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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Jun 19. 2024

인간성을 보여주는 초코파이

그린사람: ㅅㅂ


초중고 12년을 모두 공학인 학교에서 보냈다. 남녀 분반도 아니고 무조건 한 반에서. 그 12년 동안 변하지 않는 게 하나 있었는데, 여자 아이들은 한결 같이 자기가 먹을 것만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모두가 자기가 먹는 것 이상을 가져와 여러 사람과 나눠 먹곤 했다. 구성원들이 제각기 1회분 이상의 간식을 가져온 탓에 1인당 1.5회분 이상을 먹게 되는 일이 많았다.      


반면에 남자애들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은 채 다른 누군가의 음식에 의지했다. 당연하지만 이 경우 1회분의 간식이 N분의 1로 나눠지므로 가져온 사람도 얻어먹는 사람도 만족할 수 없었다. 분명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겠다만, 무슨 이유인지 내가 다닌 학교들은 하나같이 예외란 없었다. 어쩌면 그 나이 때의 남자아이들이 돌아서면 배고픈 이유는 그래서인지 모른다. 매점에서 뭐 좀 사 먹을라치면 누군가가 바로 뒤에서 한 입만! 소리가 들리곤 했으니까. 그건 차라리 낫다. 힘이 약한 아이들은 흔히 말하는 빵셔틀을 수시로 당하곤 했다. 당연히 힘이 세고 나쁜 짓만 골라하는 아이들일수록 먹는 간식의 양이 늘었다.      


사실 남자들은 성인이 돼서도 이때의 경험을 반복한다. 군대 얘기다. 특히나 최전방 오지에선 이동식 매점이나 지인들이 보내주는 택배가 아니면 생필품이나 군것질거리를 구할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부대에 먹고 싶은 과자를 보내달라는 이들은 거의 없다. 어차피 선임에게 하나씩 털릴 게 뻔하니까.


그도 그럴 게 당시에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후임의 관물대를 열어 과자를 빼 가는 선임들이 적지 않았다. 신병의 애인이 보내준 과자 박스는 가장 확실한 표적이다. 오직 애인과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 신병들 앞으로만 몸통만 한 택배 상자들이 배달된다. 상자 속 과자들이 일주일 이상 남아 있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여자친구들이 남자친구가 과자를 뺏기지 않도록 생활관 식구들의 몫까지 챙겨주곤 했지만, 그럼에도 몇몇 선임들의 가학적인 탐욕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고 군생활 내내 저런 일들만 벌어졌던 건 아니다. 하필 훈련병 신분으로 있던 때 생일을 맞았는데, 그날 관물대에 다 넣지 못할 만큼의 초코파이를 받았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받은 건 처음이었다. 정말 받기 싫은 양파맛 음료수(맛스타)도 잔뜩 받았다는 게 문제였지만.


어쨌거나 훈련병에게 초코파이가 갖는 의미를 생각하면 그건 결코 작은 성의가 아니었다. 나는 그 초코파이를 자대로 배치되기 바로 전날까지 먹었다. 이따금 손버릇이 나쁜 누군가가 남의 관물대에서 먹을 걸 훔쳐가는 경우가 생기곤 했으나, 희한하게 그날 내가 받은 초코파이는 누구도 가져가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가져갈 수 있었음에도. 이런 억압적인 곳에서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존재했던 것이다. 어쩌면 구성원 모두가 동등한 계급이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인간성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군인 아저씨'가 아니라 진짜 아저씨가 된 지금은 어느 때나 잘 먹는다. 집 바로 앞에 24시 편의점이 있고, 부엌에는 라면과 과자가 가득 쌓여 있다. 스스로의 건강을 위해 절제해야 하는 자기 통제의 의무만이 있을 뿐, 내가 먹는 것을 탐내거나 간섭하는 타인은 이제 없다. 가끔 허영심에 잔뜩 사놓은 과자들이 남았을 때는 가족들에게 선심 쓰듯 나눠주기도 한다. 장난처럼 '한입만!'을 외치던 친구들도 이제는 입맛이 바뀌었는지 과자는 잘 먹지 않는다. 이제는 누군가가 내 과자를 뺏어 먹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이따금 초코파이를 먹을 때마다 궁금해지긴 한다. 왜 어떤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눠주는데, 다른 곳에서는 그렇지 않을까. 여전히 잘 모르겠다. 어떤 면이 인간의 본성에 더 가까운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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