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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로 Jun 26. 2024

진화하는 인간과 치킨 티카 마살라

그린사람: ㅅㅂ

닭고기를 혐오하는 남자를 알고 있다. 이제까지 살면서 만난 모든 이들을 통틀어 유일하게 닭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다. 원인은 군복무. 90년대에 해군에서 복무하던 그는 군생활 내내 함정을 타고 바다 여기저기를 돌아다녀야 했는데, 보급이 열악한 바다의 특성상 거의 매일 비슷한 메뉴를 먹으며 버텨야만 했단다.


주 반찬은 냉동닭. 보통은 튀김으로 나왔는데, 사병들의 튀김 솜씨가 전문점 같을 리 없을뿐더러 짧은 시간에 수백 명 분량을 튀겨내야 했으니 맛이 없을 게 뻔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튀김이 아니라 기름에 담근 인공 화석”라고 했으니 더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려나. 그런 걸 3년 가까이 먹고 지냈다면, 흠,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주변을 보면 음식에 대한 트라우마가 단체생활에서 생기는 경우가 꽤 있다. 이를테면 학창시절 수련회에서 먹는 카레처럼. 언젠가 성인이 돼서 만난 지인들과 수다를 떨다 수련회 당시의 경험이 화제로 오른 적이 있었다. 각자 다른 학교였지만 느끼고 겪은 것들이 죄다 비슷했다. 모두 예외 없이 식탁과 식판이 굉장히 더러웠으며, 예상한 대로 밥맛도 더럽게 없었음을 공통적으로 떠올렸다. 밥을 남기는 아이들에게 선글라스를 쓴 조교들이 농부의 수고로움이나 부모의 피땀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도(그 피 같은 로 이딴 밥을 짓는 너희들은?). 


물론 그 중 최악은 카레(카레라이스)였다. 당근과 감자가 드문드문 보이는 카레 소스는 차라리 흙탕물에 가까웠다. 고기 조각은 언감생심. 여기에 밑반찬은 단무지와 김치 몇 조각이 전부였다. '카레랑 비벼먹으면 되니까 굳이 밑반찬에 신경 쓸 필요 없잖아?' 라고 대놓고 말하는 듯한 식사였다. 


확실한 건 이게 못 먹을 밥이라는 걸 수련회 조교들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부모들의 돈으로 합법적인 가혹행위를 받으러 간 2박 3일 동안, 나는 그들이 취사장에서 학생들과 같은 밥을 먹는 걸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대신 부지런히 중국집 오토바이가 조교들이 묵는 관사 뒤편을 드나드는 건 여러 번 봤다.      


고작 중학교 1, 2학년 학생들을 데려다가 맨 땅에 얼차려 시키고 준다는 밥이 그 수준이었으니, 다른 시설이 멀쩡했을 리 없었다. 베개는 언제 빨았는지 추측이 불가능할 정도였고, 매트와 이불에선 이제껏 살면서 맡아보지 못한 발 냄새가 났다. 초여름 땡볕에 물도 주지 않고 기합을 준 탓에 현기증으로 쓰러지는 여자 아이들이 속출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죄다 극기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됐다.


그 이후로 나는 당근과 감자가 들어간 카레라이스는 입에 대지 않는다. 어쩌다 학교 급식으로 나올 때면 친구와 매점에서 컵라면을 사 먹곤 했다. 성인이 된 뒤에도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로부터 “저 집 카레 맛있는데 가보지 않을래?”라는 들으면 “나 카레 안 좋아해”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다소 무례하더라도, 사실을 말해야 했다. 남은 하루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무엇이 어떻게 나오든 수련회에서 먹던 카레가 떠오를 게 뻔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뒤, 이 세상에는 카레가 아니라 치킨 티카 마살라라는 음식도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몇 년 전 지인의 손에 이끌려 인도 식당에서 치킨 마살라라는 걸 처음 먹어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본격 인도 요리였다. 막상 상에 오른 모습을 보니 내가 생각하는 그 카레와는 거리가 있었다. 붉은 빛깔 수프에 흰 생크림, 여기에 닭다리살의 조합. 결정적으로 밥과 요리가 따로 나왔고 당근과 감자도 들어있지 않았다. 언젠가 요리 잡지에서 읽었던가. 인도에는 커리도 카레도 아닌 치킨 티카 마살라만이 존재한다고.


그 말이 생각나니 약간의 자신감이 생겼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하며 숟가락으로 마살라를 떠먹었다. 호오, 이런 맛이었군. 꽤 매웠지만 아프지는 않은 느낌이 썩 괜찮았다. 매운맛이 없어진 뒤에는 희미하게 버터와 생크림의 향이 느껴졌다. 애써 싫어할 구석을 찾을 수 없는 맛이었다. 그 체험을 계기로 나는 한 단계 진일보했다. 카레와 치킨 티카 마살라를 구분해서 대할 수 있는 인간으로. 카레는 여전히 싫어하지만 이제 치킨 티카 마살라는 즐겁게 먹을 수 있다.


요즘에는 마트에서도 치킨 티카 마살라를 판다. 레토르트라 조리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이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으면 된다. 직접 요리한 것과는 비할 바 못되지만, 마살라의 향과 닭고기의 질감 모두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다.      


6월의 한 복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치킨 티카 마살라를 수저로 떠먹으면서 인간이란 진정 진보하는가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10대들이 학교의 부조리에 목소리를 내고, 비위생적인데 사디즘적이기까지 한 얼차려 수련회가 몰락하고, 어느 마트에서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 치킨 티카 마살라를 파는 걸 보면, 분명 그런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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