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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PLS 이혜령 Apr 22. 2017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고 싶다.

책 <미운 청년 새끼>를 읽고

'청년'이란 누구이고 '청년세대'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나는 청년일까?


사전을 찾아보니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창 힘이 넘치는 시기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고, 사람들은 종종  '이 나라의 기둥'이라는 표현을 쓰거나 '미래를 꿈꾸는', '아름다운', '건설적인'이라는 미래지향적인 표현과 함께 쓰곤 하는데..... 나와는 거리가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SNS 중학교 동창이 '이제 우린 청년은 아니지'라는 댓글을 남겼을 때 '그럼 우린 뭐냐'라고 물어봤어야 했다. 그전까지 나 자신을 청년이라고 믿고 있는데 그날 이후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어야 했다.  


얼마 전, 미래의 창 홍보 담당자라는 분으로부터 쪽지를 받았다. '미운 청년 새끼'라는 책이 출판되는데 읽어보고 솔직한 서평을 남겨줬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처음 받아보는 제안이라 고민이 됐다.


솔직히 책 제목도 표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벼랑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데도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철부지 청년의 모습을 그린 표지와 '흙수저', 'N포세대'도 모자라 그냥 청년도 아니고 '미운 청년'에 더해 '새끼'라니... (물론 누군가는... 아니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제목 때문에 표지 때문에 이 책을 집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래저래 개인의 취향과는 멀어 나와 인연이 닿지 않을 뻔하다가 이렇게도 인연이 되었다.


늦지만 않게 써달라고 했는데... 많이 늦어버린 것 같다. 어찌 되었던 이 책과의 만남은 조금은 부자연스럽고 부담스럽게 시작됐다.


대선을 앞두고 하루가 멀다 하고 청년 공약이 쏟아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청년', '페미니즘'에 대한 이야기들이 뜨겁다. 이 책은 아주 욕심스럽게도 핫한 이슈를 모두 담고 있다. 청년 문제나 페미니즘에 대한 그럴싸한 담론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쓰고 나니 '그럴싸하다'는 말에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치긴 한다.)  세상은 야박하고 가진 것은 많지 않은 청년 셋. 자연스럽게 각자의 이야기를 풀다 보니 그러한 이야기들까지 품어지게 됐다는 것이 좀 더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이 책은 '청년세대'에 대해 청년세대인 이들이 쓰는 자기 고백 사다. 우리 세 사람의 사변적인 이야기가 청년세대를 대변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니, 일단 내가 청년이 맞는지부터 자문해봐야 할 것 같다. (~중략~) 젊음이라는 것은 매우 상대적인 것이라 4,50대가 보기에 나는 젊은 축에 속할지 모르지만, 함께 일하는 대학생 기자들에게 나는 그냥 낭이 많은 '기자님'에 불과하다.
물론 나 스스로는 청년세대라고 자각하고 있다. 그리고 청년과 관련된 각종 뉴스에 깊이 공감하며 주먹을 부르르 떨며 분노한다. 그렇다면 나를 청년세대, 흔한 말로 청춘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p.4-5)


이들이 청년세대를 대변할 수는 없다. 이들의 말이 모두가 맞다고도 할 수 없고 동의할 수 없는 부분들도 많을 수 있다. 이들 역시 자신들이 청년들을 대변한다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동지애와 같은 복잡한 감정이 교차하게 되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나 역시 돈 때문에 한없이 쪼그라들게 됐던 우울한 기억과 이력서와 자소서를 쓰면서 느끼게 되는 자괴감, 불쾌했던 면접의 경험, 임금체불, 무기력한 상사에 대한 우울하고 불쾌했던 추억들이 자연스럽게 끄집어내게 됐다. (여전히 분이 안 풀려 자다가도 하이킥을 하곤 한다.)


청년 다움을 말하는 주체가 청년 당사자보다 오히려 중장년층이나 노년층일 때가 많다는 아이러니. 그들이 말하는 노력이니 도전이니, 열정이니 패기니 하는 청년 다움에 대한 강조는 청년에게 도리어 억압과 폭력이 되곤 했다. 다행히 요즘엔 청년을 대상화하며 억압하는 꼴이 덜 보인다. 갈수록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들고, 취업 준비를 위한 비용이 막대한데 기회는 희소하며, 운 좋게 일자리를 얻어 열심히 일해도 자본소득이 노동소득을 압도해버리는 구조를 인지한 이들이 늘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청년의 패기만으로 혈혈단신 극복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이다. (p.116)


언제부터인가 정부가 청년정책이라고 알맹이 없이 떠들어 대는 동안, 절박했던 청년들은 더 고립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년의 기준은 생물학적 나이로 무 자르듯 잘라 구분하고 혜택의 수혜자가 되기도 하고 제외되기도 한다. (청년정책의 혜택이라는 것이 정말 유효한지는 조금 더 진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다.)


어른들은 말한다. 젊은 날의 고생이 먼 훗날 달콤한 열매로 보답받을 것이라고... 현실에 안주하기엔 이른 나이라며 나태해지지 말라며 다그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는 악담을 퍼붓는 모습이야 말로 나이를 벼슬 삼아 진상 부리는 진상 어른이다.  


우리 역시 말하고 싶다. 미래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현재를 살고 싶다고.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고 싶다고.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 새로운 것에 도전할 선택과 권리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각자의 몫 아닐까? 누구도 타인의 행복을 미루게 할 권리는 없다. 나의 삶과 당신의 삶의 기준은 다르다고.


이제는 '못 해서'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보다, "나는 '안 하기'로 선택한 거고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이 필요하다"는 선언과 요구,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요소에 대한 고민들이 많이 보입니다. 삼포 세대론이 처음 나온 게 2011년쯤이니 지금 현상을 엄밀하게 얘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담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 p.21, 최서윤)


책을 읽다 말고 책을 덮고 한참을 표지를 봤다.

분명 갈곳 없이 벼랑 끝에 내몰려 위태롭게만 보이던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모습이 왠지 결의에 차 보이는 것 지나친 해석이자 정신승리일까?



망가진 나라의 미운 청년 새끼(들)이여~!!

지금부터, 여기에서부터 행복해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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