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아빠의 아빠가 됐다>
아버지와 내 관계가 부모와 자식일 뿐 아니라 유동적이고 다양하게 연결되는 사회적 관계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가족이라고 말해지기 전에 우리는 하나의 ‘사회’라고 선언한다. 나는 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다.
p.170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가족의 보호자가 된 청년(청소년)들이 있다. 이들을 ‘영케어러(Young Carer)’라고 한다. <아빠의 아빠가 됐다>는 ‘공돌이’와 ‘노가다’를 거쳐 메이커와 작가로 일하는 ‘고졸 흙수저’ 조기현이 치매 걸린 아버지를 홀로 돌본 9년을 기록한 르포르타주다. 돈, 일, 질병, 돌봄, 돈이라는 쳇바퀴 속에서 가난을 증명하고 진로를 탐색하며 오늘을 살아낸 한 청년은 국가와 사회에 묻고 또 묻는다.
돌봄을 받아야 하는 어린 나이에 가장이 돼버린 '영 케어러'들은 이들은 이제 막 자기 인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도 전에 가족의 간병과 자신의 미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선택의 기로 앞에 서게 된다. 자신의 꿈을 유보하고 가족의 간병과 생계를 떠안게 된다. 물론 정부의 지원제도가 없지 않다. 하지만 많은 영케어러들이 이러한 정보 자체를 모르거나 조건에 맞지 않아 혜택을 받지 못한다. 복잡한 절차 또한 사회적 경험이 많지 않은 영케어러에게는 큰 장벽이 된다. 가난을 증명해야 하는 과정 또한 문제다.
그렇다고 나는 ‘불효자’라고, ‘효자’가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고 말하려는 생각은 아니었다. 효자라는 말 앞에 서면 아버지를 돌보는 내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 무용해졌다. 부모 돌봄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당연한 일이었고, 그런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일 뿐이었다. 그렇다고 나를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꽁꽁 싸매는 사람들을 원망할 수 없었다. 그저 병든 아버지하고 함께하는 나 같은 사람을 부를 수 있는 말이 딱히 없으니까, 가장 ‘적당’하고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단어를 쓸 뿐이었다.
p.163-4
자식이 부모를 돌보는 게 당연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어린 나이에 직업적 안정을 찾기도 전에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영케어러가 늘어나는 상황은 영케어러 당사자뿐만 아니라 결국 사회 전체의 부담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간병살인’ 등과 같이 뉴스에서 들려오는 영케어러의 비극은 단지 개인의 비극이 아니다. 그리고 영케어러만의 문제도 아니다. 돌봄과 부양을 개인의 문제, 한 가정의 불운 또는 가족이 짊어져야 할 짐으로 치부하는 인식도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돌봄을 개인의 영역으로만 치부할 게 아니라 복지의 사각지대가 없도록 사회적 돌봄으로 바라보고 국가가 역할을 하도록 목소리를 내야 한다.
구태여 사회적 돌봄이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돌봄은 사회적 활동이다. 돌봄은 국가와 사회의 책무이며, ‘시민-되기’의 한 속성이다. 돌봄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려는 강력한 ‘의지’이기 때문이다.
p.206
<아빠의 아빠가 됐다>
- 조기현 지음 | 이매진, 2019
- 분야/페이지 | 사회과학 > 복지 / 2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