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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PLS 이혜령 Feb 12. 2022

인류가 새겨들어야 할 지구의 목소리

책 <풀의 죽음>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하고 전 지구적인 패닉에 빠진 2020년, 도대체 무슨 용기에 이 책을 집어 든 것일까? 치명적인 바이러스 창궐, 은폐하는 중국, 무너지는 사회 규범.... 소설이 아니라 예언서가 아닌지 자꾸만 의심 갔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렇게 평화롭고 풍요한 땅에서 말하고 웃고 농담하고 있는 거네.” 그녀가 말했다. “지구 반대편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말이야.”
데이비드가 말했다. “하지만 솔직히 그거 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없잖아요. 안 그래요, 앤? 그 사건 이전에도 시시각각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사람들은 충분히 많았어요. 그 사건은 다만 그 숫자를 곱절로 늘려놓았을 뿐이죠. 죽음은 결국 마찬가지예요. 한 명에게 일어나든, 수십만 명에게 일어나든 간에.”
p.32

<풀의 죽음>이 발표된 시기 1956년! <풀의 죽음>은 ‘먹을 것이 사라진’ 세상에 대한 상상에서 시작한다. 중국에서 시작된 식물을 공격하는 ‘충리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식량이 줄어들자 중국과 미얀마, 인도 등 아시아에서 수억 명의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 간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유럽)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외면하거나 ‘아시아인 특유의 엉성함’으로 인한 것이라 조롱하기까지하며 남의 일로 치부해버린다. 영국 정부는 선거를 위해 가짜 뉴스로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바이러스가 소멸하길 기다린다. 치료법을 금방 찾을 거라던 과학자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바이러스는 변이를 거듭해 세계를 초토화시킨다.


그는 갑자기 기운이 쭉 빠졌다. 마치 과거의 자신이, 즉 문명인이었던 자신이 갑자기 이 모든 사태에 관해 설명을 요구하고 나선 듯한 기분이었다. 삶이 일정 수준 밑으로 확 가라앉아버린 상황에서, 과연 이런 삶은 계속해서 이어나갈 가치가 있을까? 한때 그들은 거의 4천 년 가까운 계보를 가진 도덕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불과 하루 만에 이 모두를 벗어던지고 만 격이었다.
p.193


<풀의 죽음>은 인간의 풍족한 삶이 자연과 세계 여러 국가의 희생에 의존하고 있음을 꼬집고, 먹고사는 문제가 충족되지 않은 인간이 얼마나 쉽게 야만 상태로 전락하는지 보여준다. 소설의 장면들이 문학적 상상력이 아닌 실재하는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느낀 것은 바이러스보다는 바이러스 창궐 이후 빠르게 붕괴해버리는 문명사회 모습의 묘사때문이다. 내가 소설 속 상황에 처한다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한 명의 훌륭한 인간으로 남아 굶어 죽을 것인가?’, ‘짐승의 무리가 되어 하루를 더 살 것인가?’ 팬데믹을 지나고 있는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이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일까? <풀의 죽음>이 전하는 메시지는 인류가 새겨들어야 할 지구의 목소리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어쩐지 나는 그 바이러스가 승리하는 게 차라리 ‘정당하다’는 생각마저 들더라. 벌써 오랜 세월 동안 우리는 땅을 마치 돼지저금통인 양, 얼마든지 꺼내 써도 되는 물건인 양 대했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따지고 보면 땅도 그 자체로 생명을 지니고 있거든.”
p.81



<풀의 죽음>

 - 존 크리스토퍼 지음 | 박중서 옮김 | 현대문학, 2018

 - 분야/페이지 | 문학 > 영미소설 / 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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