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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PLS 이혜령 Feb 18. 2022

디스토피아, 멀지 않아 도래할 우리의 미래

책 <오릭스와 크레이크>

이상기후, 분쟁, 양극화되어 가고 있는 경제와 정치, 거대한 개발 소식... 요즘 뉴스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 것인지’ 계속해서 묻게 된다. 코로나 이후, 환경 파괴와 전염병 발생을 유발한 현대 문명과 인간 활동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해결책으로서의 과학 기술뿐 아니라 환경에 대한 철학적, 인문학적 관점 역시 강조되고 있다. 우리는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일까?


<오릭스와 크레이크>는 종말을 자초한 인간의 어리석음과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희망의 가능성을 담아낸 마거릿 애트우드의 ‘미친 아담 3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로, 인간성 상실 등 과학기술 발전의 어두운 이면을 그려내면서 인문학적 가치, 인류의 가치를 되묻는다.      


행복한컵 커피 관목들은 모든 원두가 한꺼번에 여물도록 고안되었다. 따라서 거대한 농장에서 커피를 재배하고 기계로 수확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는 소작농들을 커피 사업에서 몰아내고, 소작농들뿐 아니라 노동자들까지 모두 혹독한 가난 속으로 몰락시키는 일이었다.
범지구적인 저항 운동이 벌어졌다. 폭동이 일어나고, 커피 작물이 불타고, 행복한컵 카페가 약탈당하고, 행복한컵 직원들은 폭탄 실린 차에 의해 다치거나 유괴되거나 저격수의 총에 맞거나 군중에게 죽도록 얻어맞았다. 다른 한편으로 농민들은 군대에게 학살당했다. 아니, 다수의 군대, 여러 종류의 군대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상당수의 국가들이 개입되어 있었던 것이다.
(...)“흔한 폭동이로군. 저놈들, 지쳐서 결국 수그러들 거야. 모든 사람이 더 값싼 커피를 원해. 그걸 막을 수는 없지.”
p.304-7


<오릭스와 크레이크> 배경은 미래  어딘가에 있다. 눈사람/지미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이 오가고 으며, 그 과거 또한 우리에겐 미래  어디쯤이지만, 그리  미래는 아닌  같다. 양극화, 환경 파괴, 유전자 조작, 전염병의 위험, 초국적기업의 지배, 인간성의 상실.... 그들의 세계에서 겪고 있는 문제가 지금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눈사람/지미가 회상하는 과거 역시 기후 위기 혹은 팬데믹과 같은 종말적 재앙이 한차례(이상) 휩쓸고 갔음을   있다. 하버드 대학은 이미 오래전에 물에 잠겨 사라지고, 사람들은 평민촌과 엘리트 계층(조합원) 살고 있는 보호구역으로 나뉘어 살아간다. 보호구역은 전염병과 각종 위험으로부터 지켜줄 시체보안회사(초국적 기업) 보호(감시) 받는다.


“저 중간에 있는 게 머리예요. 위쪽에 입처럼 벌어지는 곳이 있죠. 그곳으로 영양물을 주입하는 거예요. 눈이나 부리 같은 건 없어요. 그런 건 필요하지 않으니까요.”
(….)
“그런데 저것은 무슨 생각을 할까?”
지미가 물었다.
여자는 익살스러운 딱따구리의 요들 같은 소리로 웃더니 소화와 흡수, 성장에 관련되지 않은 두뇌 기능은 모두 제거해 버렸다고 말했다.
(….)
“성장호르몬을 주입할 필요도 없어요. 높은 성장 기능이 장착되어 있거든요. 2주면 닭 가슴살을 얻을 수 있죠. 이제까지 개발된 가장 효과적인 저광선 고밀도 닭 사육 과정보다 3주나 개선된 거예요. 그리고 동물 복지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도 불평할 수 없을 거예요. 이것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까요.”
p.345-6


이미 한 차례(이상)의 종말적 재앙을 경험했음에도 인류는 탐욕을 버리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을 나누어 장벽을 쌓으며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탐욕을 드러낸다. 자본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과학기술을 제외한 이외의 예술과 인문학의 가치는 평가절하된다. 과학기술이 자본화되고 권력화 되어 유전자 조작으로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고 젊음과 영생을 얻으려는 노력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윤리의식, 인간성은 제거되고 생명은 상품화된다. 그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 사회는 오히려 야만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미의 어머니는 이곳에선 모든 것이 너무 인공적이라고, 그저 유원지와 다를 바가 없다고, 사람들은 예전 삶의 방식으로 결코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왜 트집이냐고 했다. 무서워할 것 없이 걸어 다닐 수 있잖아, 안 그래? 자전거를 탈 수 있고, 노천카페에 앉아서 쉴 수 있고, 아이스크림을 사러 갈 수 있잖아?
p.53



우리의 탐욕과 오만이 코로나 사태를 초래했다. 마무리는 옮긴이의 말로 대신한다.‘오늘날의 우리는 발전과 진보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전망과 위험성에 대해 잘 인식하고 있다.’(p.631) ‘<오릭스와 크레이크>는 미래에 대한 예언이 아니다. 이것은 인류가 현재의 위험한 무한 질주를 멈추지 않을 때 결국 도달하게 될 종착점을 상상적으로 재현해 보임으로써 우리에게 윤리적 결단을 촉구하는 노 작가의 엄중한 경고라고 할 수 있다.’ (p.630-1) “이대로 괜찮을까?” 더 늦기 전에 우리는 물어야 한다. 우리에게 닥친 위기에도 불구하고 ‘도시 중심적’, ‘인간 중심적’, ‘과잉 소비적’ 우리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디스토피아는 멀지 않아 도래할 우리의 미래일지 모른다.

        

<오릭스와 크레이크>

- 마가렛 애트우드 지음 | 차은정 옮김 | 민음사, 2019

- 분야/페이지 | 문학 > 영미문학 / 6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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