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름이 법이 될 때>
첫 장 넘기고 얼마 가지 못해 그대로 멈춰버렸다.
멈춰버린 곳은 2019년 11월 21일 <경향신문>의 1면 사진으로 가득 찬 페이지였다. 신문 판형보다 훨씬 작은 책 속으로 삽입되느라 사진은 뭉겨져 있었지만, 전에도 본 적이 있어 기억하고 있었다. 그 1면에는 '오늘도 3명이 퇴근하지 못했다'는 문구와 함께 떨어짐, 끼임, 깔림·뒤집힘, 부딪힘, 물체에 맞음 등 주요 5대 원인으로 사망한 노동자 1,200여 명의 명단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그중 단 한 명의 이름만이 온전히 드러나 있다.
김용균(24, 끼임)
김용균 씨를 제외하고는 OO으로 표시되어 있었는데 그 이름 속에 친구의 이름이 겹쳐져 보였다. 그 기사를 처음 본 것도 아니었고, 친구의 죽음 또한 오랜 시간 잊고 지냈기에 불식간에 떠올린 친구의 사고가 당황스러웠다. 더 이상 책장을 넘길 수가 없었다. 일하러 나갔던 친구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우리 나이 겨우 27살이었다. 책을 덮고 친구의 사고를 찾아보았다. 너무 오래되어 버린 탓일까. 아무리 검색을 해도 그 사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 이곳저곳을 뒤져 겨우 단신 처리된 기사 하나를 찾았다. 20대 김 모 씨의 사망. 친구의 죽음은 제대로 기억도, 기록도 되지 못했다.
사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어느 것도 당연한 게 없었던 죽음이었다.
'왜?', '도대체 왜?' 물어야 할 게 투성이었다. 하지만 슬퍼하기만 했을 뿐 제대로 묻지 못했다. 안타까워했지만, 분노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후 친구의 죽음을 너무 오래 지우고 살았다. 매일매일 일상 속에 친구와 같은 죽음이 있었지만, 외면해왔던 것 같다. 우리는 어쩌다 누군가의 죽음에 무감각해졌을까? 일하다 죽는 게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여기게 된 것일까.... 내가 괴물이 된 것 같았다. 어쩌다 난 괴물이 되어버린 걸까?
p.12
법이라고 하면 무뚝뚝하고 건조해서 어쩐지 멀게 느껴지지만, 누군가의 삶에 얽힌 이야기를 품은 법은 바로 그 덕에 생기와 표정을 얻어 조금 더 가깝고 친근하게 다가온다. 요컨대 사람 이름을 딴 법은 법이 삶과 동떨어진 규율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이웃의 이야기를 전문 용어로 다듬은 것이라는 걸 알려준다.
언제부터 나는, 우리는 괴물이 되었을까. 묻고 물으며 책장을 다시 넘기기 시작했다.
결코 먼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김용균, 태완이, 구하라, 민식이, 임세원, 사랑이, 김관홍... 그들은 내 친구처럼 우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 혹은 나의 또 다른 이름일지 모른다. 책을 읽을수록 우리 사회가 얼마나 부조리하고 허술했는지를 알게 됐고,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조금 더 나은 사회로 변화해왔음을 깨닫게 되었다. 비극에 압도당하지 않고, 부당함에 굴복하지 않고, 편안함에 기대 정의를 외면하지 않고, 무관심에 좌절하지 않았던 사람. 기꺼이 자신들의 이름을 내주었던 사람들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우리는 이렇게 타인의 이름에 많은 빚을 지며 살아가고 있었다.
한 사람을 기억하는 일은 잘못을 바로잡는 일의 시작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이름이 가진 무게를 감각하면서 어제보다 조금 더 잘 살아가야 한다.(11쪽)’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제대로 묻고 잘못된 일에 분노해야 한다. 진심으로 같이 분노하고 걱정해주는 누군가 한 사람. 우리 사회가 필요한 건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일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노동자 세 명이 사고로 죽고 직업병까지 포함해서 하루 평균 여섯 명의 노동자가 일하다 죽는 사회를 발가벗긴 ‘무서운 지면’에서 단 한 명의 이름만이 온전히 드러나 있다. ‘김용균(24, 끼임).’ 그제야 새삼 깨닫는다. 김용균 이전에 산업재해로 죽은 노동자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기억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걸. 많은 이가 추모한 ‘구의역 김 군’조차 성과 열아홉 살이라는 나이만 알 뿐 이름은 알지 못한다.
p.23,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 김용균법
"우리 사회는 각자도생하니까 잘사는 사람만 잘살고, 가난이 대물림되고, 너무 사는 게 팍팍하고, 기댈 데가 없고...학생들이 너무 공부만 열심히 하도록 만들어놨잖아요. 정규직 많이 뽑는 거 아니잖아요. 나머지는 비정규직될 수밖에 없잖아요. 이런 무한 경쟁을 하지 않도록 학생들이 깨어 있으면 좋겠어요. 안전한 사회, 사람 중심의 사회, 우리 학생들이 졸업하고 그런 사회에서 살 수 있도록."
p.49, 일하다 죽지 않을 권리, 김용균법
"무죄를 받는다고 해서 당사자의 억울한 세월이 없어지거나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잖아요. 명예는 회복할 수 있지만 삶은 회복이 되지 않아요. 재심에서 무죄를 받으면 언론은 보상금이 얼마나 되나 그런 기사를 막 쏟아내는데. 돈으로도 삶이 보상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돈 때문에 친지와 주변 지인과 더 멀어지고 그래서 재심 전보다 더 외로운 삶을 살기도 합니다."
p.77-8, 영원의 시간 속에 살다, 태완이법
희생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중된다면 그것이 정말 불가피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어려운 질문이라 제가 답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하지만 억울한 이를 잡는 국가 폭력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건 분명합니다. 한 생명이 우주보다 소중하잖아요."
p.78-9, 영원의 시간 속에 살다, 태완이법
천안함 피격 사건이나 마우나 리조트 붕괴 사고, 세월호 참사에서도 자식 버린 부모가 십수 년 만에 나타나 보상금을 받아갔다니, 앞으로 이런 일이 계속 생길 텐데 누군가는 나서야 하는 일이 아닌가 싶었다. 어린이보호구역에서 자식을 잃은 부모가 호소했던 민식이법이 국회를 통과한 게 얼마 전이었다. 그들도 자신처럼 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열심히 산 동생의 이름을 걸고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p.95, 부모의 자격, 상속의 자격, 구하라법
사람 이름을 딴 법에는 장단점이 있다. 특정 사건에 느끼는 안타까움이 커서 공감대가 빨리 형성되므로 상대적으로 쉽게 법개정이 될 수 있고, 딱딱하고 긴 정식 법률명 대신 누군가의 이름으로 부르면 간명하기도 하다. 하지만 단시간에 형성된 여론의 압박으로 국회가 심사에 소홀할 수 있고, 법 개정의 계기가 된 이들의 사생활이 과하게 파헤쳐지거나 이용되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민식이법이 그랬다. 특정범죄가중법에 대한 비판이 유가족을 향한 과도한 비난이 되어 그들의 삶을 할퀴었다. 민식이법을 이야기해야 하는 건 사람 이름으로 불리는 법을 대하는 우리의 이중적인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p.127, 어린이가 어른이 되려면, 민식이법
"당연한 말이지만 결국 우리 모두가 바뀌어야 되겠죠. 불법 주차 단속에 대해서 주차 못하게 하면 손님이 안 온다'라는 식의 인식이 결국 안전을 막는 거잖아요. 우리 사회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무엇보다 제도적으로 속도나 효율보다 안전에 투자하도록 정치인을 설득하는 거, 그걸 누가 하느냐, 우리가 같이 해야죠. 혼자는 못해도 함께하면 힘이 생기니까요."
p.139, 어린이가 어른이 되려면, 민식이법
"판결문을 읽으면서 '때로는 법이 어떤 정신과 치료보다 정확한 치유와 깊은 위로를 주는구나' 그걸 느꼈어요. 임 교수가 한 행동이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구조 행위였음을 반박할 수 없게 정리해주더라고요. 정의가 주는 위로라는 게 그런 것인가 봅니다."
p.171, ‘아픈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지 않게, 임세원법
"소송을 하면서도 화가 안 풀려요. 세상에 딸의 실존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게 납득이 안 되니까요. 그때 저는 사회에 대한 분노로 거의 반쯤 미쳐 있었어요. 이런 불합리함을 세상에 외치기라도 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
p.186, 태어났기에 당연한 것, 사랑이법
선체에 진입해 실종자를 찾는 일이 시급했지만 스쿠버를 주로 하는 해경 잠수사들은 심해 잠수 경험이 거의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어려움을 들은 민간잠수사들이 자발적으로 모였다. 국가가 부르기 전이었고 어떤 계약도 없었지만, 자신들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곳으로 스스로 왔다.
p.207, 의로움에 대하여, 김관홍법
- 정혜진 | 동녘, 2021
- 분야/페이지 | 사회과학 > 법 / 2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