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아버지의 해방일지>, <여수역>, <공마당>
어제(6일), 정부가 여순사건 당시 사망한 민간인들을 처음으로 희생자로 인정했다. 여순사건이 발생한 지 74년 만이다. 진상 규명에 대한 진행이 제주4.3에 비해 더딘 것은 알았지만, 이제야 첫 희생자 인정이라니... 하긴 여순특별법 또한 지난해에야 제정되었으니 생각해보면 놀랄 일도 아니다. 제주도민 학살 명령을 거부로 시작된 사건이지만, 제주에서조차 여순사건을 제대로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이런 낮은 인식과 관심에 비해 여순사건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크다. 국가보안법의 탄생, 빨갱이라는 족쇄의 시작, 독재 정권, 5.18까지 이어진 민간인 학살의 시작 또한 여순 사건과 깊게 연루되어 있다.
여순사건은 여수 주둔 14연대가 제주도민을 학살하라는 잘못된 국가권력의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이다. 군인의 봉기는 민중들이 함께하면서 항쟁으로 발전했다.
이후 정부가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수, 순천, 구례, 광양 등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됐다. 말 한마디에, 손가락질 한 번에 삶과 죽음이 갈려졌다. 하지만 그들은 이후 국가보안법과 연좌제로 인해 제대로 된 사과나 진상규명은커녕 오랜 시간 숨죽여 살 수밖에 없었다.
오랜 세월 숨죽여 살 수밖에 없었던 아픔의 역사뿐 아니라 군인과 민중이 왜 저항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들은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등 저항의 역사에 대해서도 우리는 묻고 제대로 기록해야 한다.
그들은 어떤 목소리를 냈을까?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p.76
아버지는 선택이라도 했지, 나는 무엇도 선택하지 않았다. 나는 빨갱이가 되기로 선택하지 않았고, 빨갱이의 딸로 태어나겠다 선택하지도 않았다. 태어나보니 가난한 빨갱이의 딸이었을 뿐이다.
p.169
형의 친구이고 동지였으며, 운명이 조금만 달랐다면 형과 친구의 처지가 뒤바뀔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건 어디에나 있을 우리네 아픈 현대사의 비극적 한 장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대단한 것도, 그렇다고 이상한 것도 아니다. 그저 현대사의 비극이 어떤 지점을 비틀어, 뒤엉킨 사람들의 인연이 총출동한 흔하디흔한 자리일 뿐이다.
p.252-3
아버지는 백운산에 가장 오래 있긴 했지만 이산 저산 떠돌며 48년 겨울부터 52년 봄까지 빨치산으로 살았다. 아버지의 평생을 지배했지만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던 건 고작 사 년뿐이었다.
고작 사 년이 아버지의 평생을 옭죈 건 아버지의 신념이 대단해서라기보다 남한이 사회주의를 금기하고 한번 사회주의자였던 사람은 다시는 세상으로 복귀할 수 없도록 막았기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의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서 아버지는 고작 사 년의 세월에 박제된 채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는 더 오랜 세월을 구례에서 구례 사람으로, 구례 사람의 이웃으로 살았다. 친인척이 구례에 있고, 칠십년지기 친구들이 구례에 있다. 아버지의 뿌리는 산이 아니다. 아버지의 신념은 그 뿌리에서 뻗어나간 기둥이었을 뿐이다. 기둥이 잘려도 나무는 산다. 다른 가지가 뻗어 나와 새순이 돋고 새 기둥이 된다.
1948년 여수, 그리고 그 이후
양영제의 <여수역>
p.110
“하이고... 나도 거기로 다시 끌려가 쪼그려 앉아 심사를 기다린디 교실에서는 곡소리 나지 운동장에서 김종원 고놈이 칼 빼들고 지가 백두산 호랑이라고 함씨롱 워마 워마! 징 한거....”
“긍께 말이오. 무슨 닭 잡는 것도 아니고라. 뭐 그런 괴물이 다 있으까라잉.”
“그런 괴물을 만들어 낸 난리가 괴물인 것이제.”
“아녀라 어르신. 고놈은 태어날 때부터 백정 종자랑께라.”
“백정이 누가 태어날 때부터 백정이간디. 백정 짓을 해도 되게끔 만든 난리가 진짜 백정이지.”
“아무리 난리라고 해도 백정 종자가 아니믄 어찌게 근다요?”
“긍께 고놈을 백정으로 만든 놈이 진짜 백정인 거시지.”
p.188
같은 공간에서 성장한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해도 사실에 대한 진실은 사뭇 달랐다. 진실이 다른 것은 기억된 것에 대한 사실이 다른 것이 아니라, 서 있는 곳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결국 어느 곳에 서 있었느냐에 따라 기억에 대한 진실의 다름이 틀림으로 되어버려 옥신각신하도록 만들었다. 훈주 동창들이 각자 침을 튀겨가며 자기 주장을 하고 있을 때 정작 조문 온 노인들은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만 하고 있었다.
p.228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훨씬 약해진 의구심을 통해서 다시 반복되는 것을 훈주도 겪어 왔기 때문이었다. 사람마다 그림자가 있듯이 사회와 국가에도 그림자가 있는 것이다. 들여다보지 않고 회피했을 때 그림자는 회전문이 되어 또다시 생채기를 남기는 것을 팔십 년 광주에서 겪어야만 했다.
여순사건 이후, 순천 사람들의 삶과 역사적 상흔 담아
정미경의 <공마당>
p.63
지은 죄도 없이 숨을 죽이고 서 있던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총알이 관통했을 때 누구도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자신들이 내지르는 비명 소리가 행여 바로 뒤에 서 있는 가족들에게 누가 될까 두려웠으리라. 놈들이 문득 사람의 마음으로 돌아와 총질을 멈추려 할 때 자신들의 호들갑스런 비명 소리에 다시 미치광이가 돼버리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웠을 것이다. 죽어가는 순간까지 침묵하는 것, 그것이 그들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게 하는 것이고, 남은 가족을 위한 최선이라 여겼을지도 몰랐다. 순영은 순간이었다고, 스물두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데 소용된 시간이 찰나였다고 생각하며 가슴을 쓸었다. - <신전> 중에서
p.80
국가가 다 뭐다요.
할머니가 물었다. 이름 한번 잘못 불린 걸로 딱 그걸로 억지 죽음을 당했는데 참말로 분하고 원통한 일 아니냐고, 그렇게 간 사람도 불쌍하지만 죄 될 말로 남은 사람들도 그보다 덜하지는 않다고, 수절하여 키운 자식 결혼시킨 뒤 시어매는 아들이 사립문을 나서는 순간 자기를 들볶아댔다고, 하다못해 자기 딸에게까지 손찌검을 서슴지 않았다고 엄마는 속사포 쏘듯 주저리주저리 쏟아냈다. 한 사람의 죽음으로 3대에 걸쳐 불행이 이어지니 그런 비극이 없다고 흥분하는 엄마에게 그것이 국가 탓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느냐, 국가에 대한 원망, 바라는 것 다 좋으니 마음껏 해 보라는 연구원의 말 끝에 할머니가 한 말이었다. - <금목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