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전시 | 앤디 워홀의 퀴어적 삶을 조망한 3개의 전시
앤디 워홀은 미술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예술가 중 한 명일 것이다. 1960년대에 등장한 워홀은 소비주의, 유명인을 주제로 고급 예술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드는 상징적인 작품으로 팝 아트 운동을 개척했다. 그는 예술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에 도전하며 현대 미술의 지형을 재편하면서 20세기 예술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처럼 20세기의 현대 예술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많은 이가 그를 동경했지만, 그는 살아생전 그를 동경해 온 세상으로부터 온전히 그를 받아들여지는 열린 수용을 경험하지 못했다.
개방적인 도시의 분위기 있겠지만, Pride Month인 6월이 맞물려서인지 퀴어를 다룬 전시들이 많았다. 앤디 워홀의 전시가 바로 그중 하나였다. (아닌 셋…. 베를린에서 두 번, 뮌헨에서 한 번, 어쩌다 보니 2주간 머무는 독일에서 앤디 워홀의 전시만 3번이나 봤다.) 처음으로 관람한 전시는 베를린 노이에 국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벨벳의 분노와 아름다움》전이었다. 세 전시 모두 퀴어를 다루고 있지만, 다른 전시에서는 여러 테마 중 하나로 다루고 있었고 온전히 ‘퀴어’에 초점을 맞춘 전시는 이 전시가 유일했다. (지하의 영상관과 커다란 1층 전시실 두 개의 전시실에서 대규모로 열리고 있었다.) 전 세계적으로 처음이라고 한다.
앤디워홀이 활동했던 1960년부터 1980년대는 미국에서도 동성애는 불법이거나 정신병으로 간주되어 왔기 때문에 워홀은 진정한 “커밍아웃”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반공주의의 광기가 휩싸였던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커밍아웃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고 한다. 동성애자로 밝혀질 경우 일자리를 잃는 경우도 다반사였을 뿐 아니라, 동성 간의 성행위를 처벌하는 남색법이 존재하여 징역형으로 처벌되는 경우도 많았다. 놀랍게도 미국에서도 성소수자를 처벌하는 법은 21세기가 되어서야 폐기되었다. 1969년 스톤월 항쟁으로 동성애자와 트랜스젠더들이 차별에 반대하며 공개적으로 저항을 이어나가면서 성소수자에 대한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70년대 흑인 시민권운동, 인종차별반대운동, 페미니즘운동, 반전과 국제연대운동 등 진보적인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면서 뉴욕과 샌프란시스코 등 도시에서 퀴어는 점점 더 눈에 띄게 되었다.
워홀은 자신의 성적 지향을 숨기지 않았고 작품으로 다수 남겼지만 앞서 밝혔던 것처럼 그가 활동했던 시기 동안 그러한 작품들은 부적절하거나 부도덕한 것, 변태적인 것으로 간주되고, 불법이었기 때문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을 많은 작품을 남겼음에도 생전에 대중적으로 공개할 기회는 갖지 못했다고 한다.《벨벳의 분노와 아름다움》은 미국의 동성애자 해방 운동, 워홀의 연인들, 트랜스젠더와 드랙 퍼포머, 신체의 아름다움, 특히 남성 신체에 대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그림, 판화, 드로잉, 사진, 영상, 폴라로이드, 콜라주 등 300여 점이 넘는 작품을 모아놓았다. 앤디 워홀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전시였다. 그의 활동했던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까지도 외설이냐, 예술이냐 논란이 있었을 작품들은 워홀의 성에 대한 솔직한 욕망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 전시 섹션 중 워홀의 별명이었던 드라큘라와 신데렐라의 합성어인 <드렐라> 시리즈는 다양한 여성의 모습으로 변장한 워홀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숨기거나 위장해야만 했던 그의 퀴어적 욕망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이 전시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섹션이다.
파티광으로 유명했던 앤디 워홀. 파티가 끝나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이미지가 아닌 진짜 워홀은 어떤 모습일까? 베를린 포토그라피스카 미술관의 《파티가 끝나고》는 인싸 중의 인싸의 삶을 살았던 워홀의 내면, 정체성에 집중해 전시를 풀어냈다. 워홀의 사진과 영상 켈렉션을 중심으로 구성된 이 전시는 트랜스젠더와 드랙 퍼포머를 담은 사진은 다양성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며 사회적 규범에 도전한다. 영화배우부터 가수, 정치인, 예술인 등 유명인들을 찍은 워홀의 폴라로이드 사진 시리즈와 1970년대부터 1986년까지 이어진 <나이트 라이프 Night Life> 시리즈, <빈 호텔방> 시리즈는 화려함을 쫓는 시대적 단면과 일상의 고요함과 삶의 덧없음을 표현하며 화려함과 고독을 넘나드는 워홀의 내면으로 관객들을 초대한다.
마지막으로 본 전시는 같은 시대를 살았던 워홀과 해링 두 예술가의 인연을 추적한 뮌헨 브란트호스트 미술관의 《앤디 워홀과 키스 해링의 파티 오브 라이프》다. 나이 차이 많이 나고 작품의 스타일도 다르지만, 그들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다 펜실베니아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억압받던 게이 남성으로 뉴욕에 도착한 이후 예술적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다. 나이 차이에도 불고 하고 그들은 서로에게 여향을 미치는 친구이자 동반자였다. 짧은 시간 동안 워홀의 전시를 세 번이나 본 탓에 이 전시에서는 워홀보다는 키스 해링에 더 눈이 갔다. 에이즈 판정을 받은 이후에도 반전ㆍ반핵운동과 인종차별 반대 운동, 에이즈 예방 운동 등을 이어간 키스 해링의 행보는 놀라웠다. 각각 피격과 에이즈로 죽음을 목도한 이후 행보나 종교에 대한 두 예술가의 관점을 비교하며 전시를 보는 것도 이 전시의 묘미 중 하나였다. 극심한 사회 격변기에 등장한 두 예술가는 위기에 시대에 대한 다양한 작품을 남겼다. 이 전시에서는 130개가 넘는 작품을 소비문화, 새로운 미디어, 퀴어, 핵전쟁, 에이즈 위기, 사회운동 등 다양한 주제로 나눠 두 예술가들을 세계관을 흥미롭게 펼쳐냈다.
앤디 워홀이 죽은 지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그가 활동할 시기에 비해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편견 없이 워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