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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이 Oct 02. 2020

이방인들의 사랑법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1995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는 1992년 로버트 제임스 윌러가 쓴 베스트셀러 소설을 1995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겸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이다.  뮤지컬로도 성공한 작품이기도 하다.   눈으로는 아이오와주의 평화로운 모습을, 귀로는 마리아 칼라스의 아리아를 비롯해 블루스 등 음악이 흐르고, 가슴은 잔잔하고도 큰 파장의 울림이 곳곳에 묻어나는 명작이다.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1930년 생으로 (현재 90세) 미국 영화계에서 배우로, 감독으로 한 획을 그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섬세하고 잔잔한 연출로, 깊고 부드러운 연기로 모든 우려를 불식시킨 작품이다.


  원작 소설을 먼저 읽은 터라 65세 클린튼 이스트우드가 52세의 로버트로 어울릴까 싶고, 메릴 스트립과의 나이차도 걱정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어쭙잖은 노파심이었다. 영화 초반에는 클린튼 이스트우드의 나이 든 모습이 곧잘 눈에 띄었는데 영화 후반으로 갈수록 연륜에서 묻어 나오는 사랑의 눈빛과 진실된 감정이 녹아난 덕에 그의 주름은 어느새 화면에서 거의 가려졌다.


  프란체스카 역의 메릴 스트립의 연기는 일상적인 평범함과 애틋한 사랑의 설렘까지 연기의 보폭은 넓고, 감동의 진동은 더욱 컸다.  이 영화 이후 메릴 스트립이라는 배우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다.     




 파병 군인이었던 남편을 따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미국 아이오와주 농장 마을로 시집온 프란체스카는 식사 준비하며 오페라 아리아를 듣는다.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1977)가 부르는 오페라 《노르마 Norma》 중  Casta diva가 흐르지만 엄마가 음악을 듣고 있던 중 가차 없이 채널을 돌려버리는 딸과 아무런 대화 없이 그녀가 준비한 식사를 하는 남편과 가족들... 프란체스카의 무너진 일상이자 깡마른 현실이었다. 가슴이 터질 듯이 답답하지만 가족 누구에게도 말을 건넬 수 없을 만큼 가족들은 무심하고 이기적이다. 주부 프란체스카의 하루는 분주하지만, 프란체스카의 눈빛은 메마르고, 웃음은 사라졌으며, 영혼은 빛을 잃어가는 중이었다.

마리아 칼라스


남편과 아이들이 3박 4일 일정으로 가축 박람회에 가고 혼자 집에 남은 프란체스카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중 아리아 <그대의 음성에 내 마음이 열리고>를  듣는다. 모처럼의 여유를 즐기고 있을 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중년의 사진작가 ‘로버트 킨케이드’가 매디슨 카운티라는 조그마한 지역에 있는 지붕 덮인 다리[로즈만 다리]를 취재하기 위하여 프란체스카 집 앞에 멈춘다.


낯선 나라의 문화 속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프란체스카,  문학교사를 꿈꾸었으나 자신의 꿈을 접고 농사일을 하는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평범하게 살고 있던 프란체스카 앞에 낯선 이방인은 프란체스카 일상에 뒤흔들 지진을 몰고 왔다. 길을 묻는 로버트에게 친절하게 직접 길을 안내하면서 그들은 일생에 한 번뿐인 강렬한 사랑이 시작된다.

이전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로버트는 단숨에 프란체스카의 가슴속 모든 감정을 읽어낸다. 로버트가 예이츠의 시를 읊자 프란체스카의 잃어버린 감성이 되살아난다. 감추고 숨겨야 했던 감성, 지성, 열정, 꿈이 프란체스카를 춤추게 한다. 로버트는 그렇게 프란체스카가 잊고 있었던 것과 잃어버린 것을 일깨워주며 두 사람은 영혼의 대화를 나눈다.

그들은 단 나흘간 짧고도 불같은 사랑을 나눈다. 로버트는 프란체스카에게 함께 떠나자고 했으나 프란체스카는 자신의 선택한 사랑에 책임지고자 남편과 아이들을 선택한다.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 오는 거요."


남편과 함께 시내로 장을 보러 나온 프란체스카는 길 건너편에서 장대비에 온통 젖은 채,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향해 서 있는 로버트를 발견한다.
차에서 프란체스카가 내려 자기에게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그녀를 향해 절절하게 건네는 눈물 속의 희미한 미소.
그러나 그저 바라만 볼뿐 서로 다가가지 못하는 두 사람...
남편의 차는 출발하지만 교차로에서 로버트의 트럭과 다시 마주친다.
차 앞을 가로막은 채 꼼짝을 하지 않은 채

그에게 준 그녀의 목걸이를 백미러에 걸며

지금이라도 그에게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보낸다.






프란체스카가 차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놓았다 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백미이자,

메릴 스트립의 연기력에 무릎을 꿇게 되는 장면이다.




세월이 흘러 프란체스카의 남편은 임종을 맞으며 아내에게 말한다. “당신에게도 꿈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 프란체스카는 남편이 죽은 후에 로버트를 찾지만 실패했다.  프란체스카는 한참 후에 로버트의 생명과도 같은 카메라와 다리 사진이 실린 <내셔널 지오그래피> 한 권과 편지와 수첩 몇 개가 들어 있는 그의 유품들을 소포로 받는다.


안개 내린 아침이나 해가 북서쪽으로 기울어지는 오후에는

당신이 인생에서 어디쯤 와 있을지,

내가 당신을 생각하는 순간에

당신은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 생각하려고 애쓴다오.    

 

우리는 우주의 먼지 두 조각처럼 서로에게 빛을 던졌던 것 같소.

신이라고 해도 좋고, 우주라고 해도 좋소.     

나는 마음에 먼지를 품은 채 살고 있다오.

    

당신과 함께 보낼 수 없는 시간의 통곡소리가

내 머릿속 깊은 곳으로 흘러들고 있소     

당신을 사랑하오.

깊이, 완벽하게,

그리고 언제나 그럴 것이오.

                                         로버트의 편지



프란체스카는 아들과 딸에게 남긴 유언장에서 화장해서 로즈먼 다리에 뿌려달라고 부탁한다. 그때 로버트를 따라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진 않지만, 살아서 후회 없이 가족들을 사랑했으니 죽어서는 그의 곁으로 가고 싶다고.  어머니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아들은 분노하지만 딸은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어머니를 이해하고 오빠를 설득한다. 유언대로 죽어서 로버트와 함께 하게 된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여자를 나누면 몫은 자식들, 나머지는 영혼 잃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 전 자신의 존재는 내려두고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가족을 뒷바라지하는 일은 고행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긴 고행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실 체념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포로로 살다 보면 스스로 인생 자체를 폄하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 아닐까 싶다.    


엄마, 아내, 며느리로 살아가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누구나 어울리거나 잘 해내기는 힘든 일이기도 하다. 사랑으로 시작된 관계지만 세월 속에서 습관이나 필요로 요구되는 서글픈 관계가 되는 부부지간. 서로의 바람도 알고, 꿈도 알지만 애써 외면하면서 살아간다. 프란체스카 역시 권태로운 삶의 바퀴 속에서 흑백 인형처럼 잘 살아간다. 로버트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의 일을 찾아 훌훌 떠다니는 로버트, 영혼은 자유롭지만, 진중하고 섬세하고 자상한 남자로 무채색 프란체스카 앞에 나타난다. 한 사람으로서 존중해주고, 여자로 배려해주는 로버트 앞에서 프란체스카는 비로소 자기 색깔과 목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생 중 단 4일 동안만 함께 한 시간이라는 점에서 이 이야기가 중년의 불륜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않았을까 싶다.

진정한 사랑을 찾았고, 영원한 사랑이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프란체스카는 가족과 자신을 내던져버리지 않았기에, 자신이 애초에 선택한 사랑에 대한 책임을 완수했기에 남은 일생동안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었던 모습이 아름다울 수 있었다.

만날 수 있었지만 만나지 않고, 함께 할 수 있었지만 떨어져서 평생을 그리워하고 서로가 서로를 지켜준 그 진지하고도 깊은 사랑이 과연 존재할까? 사랑을 넘어선 존중과 믿음이 긴 시간의 틈을 메워준 것이라 생각한다.


프란체스카가 자신만의 색과 목소리를 지킬 수 있는 역할을 남편은 할 수 없었을까? 아니, 왜 남편은 프란체스카의 본모습을 지켜주지 못했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동시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결혼은 서로를 왜 잿빛으로 물들이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이방인]이라는 말이 자꾸 맘 속을 기웃거렸다.

프란체스카는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떠나온 이방인이었고, 로버트는 자유롭게 떠도는 이방인이었다.

마리아 칼라스 역시  그리스계 이주민으로서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세기의 디바로 유명하지만 평생 도도한 외로움을 안고 살았다.


태어나고 자란 곳을 떠나 낯선 곳에서 살아내야 하는 이방인들의 숙명은 외로움과 그리움이다.

외로움과 그리움은 사람으로 치유받고 위로받는다.

자신의 외롭고 지친 영혼을 읽어준 사랑에게 일생토록 마음을 내어준다는 일은 아름답고도 애타는 일이다.

사람과 사랑에 기대어 울고 웃는 우리도 어쩌면 모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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