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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이 Feb 17. 2021

여리고 약한 이들의 소리를 모아

영화 [셀마], 2014

       

재즈, 흑인 성가를 들으면서 불현듯 떠오르는 우리나라 민요가 있었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서 시집살이 삼 년 만에
시어머님 하시는 말씀 얘야 아가 며늘아가
진주 낭군 오실 터이니 진주 남강 빨래 가라


진주 남강 빨래가 니 산도 좋고 물도 좋아
우당탕탕 두들기는데 난데없는 말굽소리
곁눈으로 힐끗 보니 하늘 같은 갓을 쓰고
구름 같은 말을 타고서 봇 본 듯이 지나더라      


.

.

체념과 탄식으로 범벅이 된 [진주난봉가]라는 민요로 스무 살쯤 귀동냥으로 듣고서 알게 된 노래였다. 읊조리듯 불러 가사가 명확히 들리지 않았지만, 대략은 시집살이에 관한 내용이었다. 당시에는 시집살이에 대한 이해나 공감을 하지 못했다. 다만 곡조 끝에 매달린 구슬픈 잔상이 오래 남았을 뿐이다.  


 한동안 잊고 살다가 결혼 후 문득문득 이 노래가 떠올랐던 적이 있었다. 가족 내에서, 가정 내에서 수시로 외롭고 고단했 그때마다 구슬픈 곡조에 내 지친 마음이 포개어졌다. 나와 무관할 듯한 그 음악이 나를 위로하기도 하고, 철 모르고 따라 부르던 그 시절로 성큼 데려다 주기도 했다.


모진 시집살이와 가부장적인 유교 사상에 희생되던 여성들의 심정을 대변한 민요였다. 지금 와서 보니 그 민요에는 도전과 변화, 희망의 메시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내 핍박과 억압의 시절, 나와 같은 처지의 누군가가 불렀을 노래를 나누면서 그렇게라도 서로를 위로하며 버텨온 이들에 대해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흐르던 재즈와 민요, 도무지 교집합이 없을 듯한 두 장르의 음악에서 처연한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영화 [셀마]는 1965년 미국 남부의 소도시 셀마를 배경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펼친 평화행진으로 흑인의 참정권을 획득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흑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가히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었다. 같은 류의 영화 [그린북]에서는 흑인에게 가해진 무시와 차별을 넘어선 학대와 폭력이 좀 더 면밀하게 그려져 당혹스러웠다. 미국인들은 예술을 사랑했지만, 흑인 예술가는 존중하지 않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러나, 음악을 통한 소통, 리듬과 장단에 대한 이해만으로 그들은 우정을 쌓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대와 나라의 구분 없이 기존의 질서와 체계를 거부하거나, 새로운 세계를 향해 도약할 때마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그러나 오랜 세월 동안 핍박받던 민족이나 인종에게는 그들만의 보이지 않는 힘이 깃들어있다. 제대로 맞설 수 없는 처지였지만 절대 굴복하지 않고, 잠자코 물러서고만 있지 않았다.


  이들의 여린 힘을 엮어낸 것은 바로 음악이었다. 음악의 힘으로 여리고 연약한 이들을 굳세게 결집시킨 예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재즈, 포크, 락 등의 장르는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시대를 지향하는 저항의 정신을 담은 음악으로 많은 이들을 위로하고, 연대하게 했다. 무참히 짓밟히는 현실 속에서도 낮게 깔리는 믿음의 선율은 그들을 강하게 태어날 수 있도록 독려했다.     


  영화 [셀마]의 주제음악 “glory”는 권력의 총칼 앞에서 쓰러지는 동료를 지켜보면서도 끝까지 비폭력으로 버티는 이들에게 가장 강력한 무기가 스스로를 지켜준다. 그들이 큰 목표를 향해 올곧게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음악에 의지하며 마음을 모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재즈에 담긴 정신은 도전과 희망이 넘쳐난다. 경쾌하거나, 강력하지는 않지만 여리고 약한 이들을 포근히 품어준다. 비록 당장의 변화는 없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을 심어준다.


  음악은 상처받은 영혼들의 읊조림이 아닐까? 너와 나로 분리되지 않고, 우리를 노래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위로의 수단. 음악은 인간에게 서서히 스며들어 마침내 깨어나게 하는 가장 큰 축복이자 선물이다. 진주난봉가를 읊조리던 조선의 어린 며느리들과 두 손을 머리에 얹고 무릎 꿇은 니그로들의 눈빛이 녹아있는 음악 속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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