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초등 5학년인 늦둥이 막내가 코로나로 일주일에 한 번 학교에 다녀온 후 들려준 반가운 소식이었다.
연년생 두 아이를 키우고 이제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을 때 덜컥 막내가 생겼다. 큰아이와는 띠동갑, 둘째 아이와는 열 살 차이의 막둥이였다. 이른 나이에 결혼하고 두 아이가 고학년이 될 때까지 철저히 엄마로만 살았다. 준비도 없이, 배운 적도 없이 엄마가 된 후 좌충우돌 초보 엄마의 딱지를 막 떼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늦둥이 임신으로 또다시 육아의 늪 속으로 빠져 버릴 인생을 생각하니 늦둥이의 존재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았었다. 더군다나 남편과는 주말부부로 지내던 터라 육아와 살림은 모두 내 몫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또한, 막내를 출산한 09년 여름에는 신종플루가 유행하던 터라 도통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고, 신생아가 있는 집에는 더욱이 방문을 자제하던 시기였다. 산후우울증을 피할 길이 없었다.
막둥이는 가족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사랑과 행복을 주고받는 존재였지만 내게는 또다시 치러내야 할 세 번째 육아라는 생각이 더 많았다. 젖을 물리면서도 가슴속은 텅 비어갔다. 꼬물대는 아이를 바라보는 눈에서는 눈물이 어려있었다. 수개월 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고, 제대로 챙겨 먹지 못했다. 산후우울증과 대상포진은 한꺼번에 몸과 마음에 몰아쳤다. 대상포진 통증이 대수롭지 않게 느껴져 치료조차 받지 않았다. 몸의 통증보다 마음의 통증이 훨씬 깊고 아팠다.
엄마의 힘겨운 일상을 지켜보던 당시 초등 4, 6학년 두 아이는 일찌감치 철이 들었다. 수면제를 먹고서도 아침 녘에야 잠이 드는 엄마를 대신해 알람을 맞춰두고 알아서 일어나는 습관은 그때부터 생겼다. 두 아이는 서로 깨워주고, 소리 나지 않게 물통과 수저통을 챙기고, 아침도 거르고 학교에 가는 날이 많았다.
두 아이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 집으로 돌아오면서 보고 들은 것들에 대해 조잘거렸다. 영혼이 홍역을 치를 때여서인지 아이들의 조잘거림도, 아이들의 자라는 모습조차도 잘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세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것만으로 모든 에너지를 다 소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막내가 돌이 지날 무렵부터 조금씩 일상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완벽하게 일상으로 돌아오게 된 계기는 따로 있었다.
둘째 아이의 달리기 시합 때문이었다. 둘째 아이는 19개월 차이 나는 언니와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했는지 어려서부터 욕심이 많았다. 뭐든지 해 보려고 했고, 지는 것도 싫어했다. 울면서도 끝까지 해내는 편이다. 그래서 대부분 큰아이를 이겨 먹었다. 덩치도, 키도, 먹성도. 그러나 유독 큰아이에게 매번 지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달리기였다. 큰 아이는 작고 여리했지만 짧은 거리를 재빨리 달렸다. 어른들이 “한 살이라도 더 먹은 게 그래서 다르다” 하셨다. 둘째 아이는 늘 헐떡거리며 분을 못 이겨 씩씩거렸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직후부터 고학년이 될 때까지 2~3년 동안 체육대회나 운동회에서 달리기는 영 젬병이었다. 나는 욕심 많은 아이의 속상함이 매번 맘에 걸리긴 했지만 타고난 것이 아닌 이상 별다른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어린 시절, 친가에 가면 친척들이 집안의 달리기 유전자에 대한 예찬을 읊었다. 사촌오빠, 언니들은 물론 특히 친정 아빠는 달리기 대회에 출전하기만 하면 양은냄비, 양은 주전자를 부상으로 받아왔었다는 얘기는 단골 이야깃거리였다. 안타깝게도 나와 남동생 모두 달리기에 소질이 없어 왠지 뻘쭘했던 기억이 있었다.
친정아버지는 만 50세에 직장 체육대회 달리기 시합에 참여하셨을 정도로 달리기와 삶에 애착이 많으셨다. 달리기 시합은 젊은 사람들이 하는 거 아니냐는 나의 물음에 “달리기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지금 내가 얼마나 뛸 수 있는지 보고 싶어서 하는 거야”라고 답하셨다. 아버지는 젊은 사람들과 나란히 출발선에 서서 당당히 3등을 하셨다. 그러나, 그 이듬해 예기치 못한 병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어느 날, 둘째 아이가 달리기 대회에 반 대표로 뽑혔다고 했다.
“엥, 너 달리지 못하잖아?”
“지난번에 대표로 뽑혔다고 말했는데”
“아, 그랬나? 또 깜빡했네”
아이는 고학년이 되면서 키도 커지고 운동 신경이 부쩍 좋아졌는데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엄마가 산후우울증으로 생을 방관하던 때도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둘째 아이는 한 달 동안 반대표끼리 경합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학교 대표 4명 중에 뽑혔다. 인근 학교에서 열린 교육청 배 이어달리기 대회에 출전하게 된 것이었다. 대회 날 유모차에 막내를 태우고 대회장을 찾았다. 모처럼 외출이었다. 초등학생들이었지만 대회를 앞둔 터라 아이들의 표정에서 긴장감이 가득하였다. 아이의 얼굴도 볼 겸 준비해 간 음료수를 전달하러 갔다. 아이는 만날 수 없었고, 같은 학교 남학생을 만나 누구 엄마라고 소개하고 음료수를 전했다. 그리곤 넌지시 둘째 아이가 잘 뛰냐고 물었다.
“네, 여자 중에 젤 잘 뛰어요. 그런데 뛸 때 표정이 좀….”
“표정이 왜?”
“이따 보세요.”
관중석에 돌아와 무슨 소리일까 궁금할 새도 없이 출발선에 아이가 서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땅”
출발을 알리는 신호 총소리와 함께 막내의 울음이 터지고, 둘째 아이는 솟구쳐 뛰쳐 올랐다. 그런데 달리는 모습이 어린 시절 언니를 쫓아 뒤뚱거리던 모습이 아니었다. 어느새 길어진 다리로 껑충껑충 달리고 있는 모습이 낯설었다. 순식간에 막내를 안고 서 있는 곳을 지나치는 아이의 표정을 보고 나는 그만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여유로운 다른 아이들의 표정과는 달리 아이의 표정엔 “죽기 살기”가 가득 베어져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예전 아버지가 생의 마지막 달리기 때 모습과 흡사했다. 내 아버지와 내 아이가 달리면서 온 힘으로 주어진 시간을 통과하는 모습이 닮아 있었다. 타고난 실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 주어진 순간, 이겨내야 할 순간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아이가 결승선에 몇 등으로 들어갔는지 볼 수 없었다. 이미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 후로 몇 번의 신호 총소리를 들을 때마다 정신이 번쩍번쩍 들었다.
그동안 아버지의 달리기 유전자 대신 최선을 다하는 삶의 자세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몇 해 동안 현실에 무릎 꿇린 채 이끌려 지냈던 점을 반성했다. 아버지와 나 그리고 딸로 이어지는 달리기에서 바통을 제대로 넘겨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합이 모두 끝나고 운동장 끝에서 둘째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좀처럼 동생을 데리고 외출하지 않던 엄마를 보고 반가웠던지 내 품에 와락 안겼다. 아이를 품에 안았지만, 오히려 아이가 나를 안아주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나를 점령했던 산후우울증과 무기력이 모두 내쫓겼다. 그날 이후 예전의 평범한 일상에 안착할 수 있었다.
십 년이 지나 유모차를 탔던 막내가 딱 둘째 아이의 나이가 되었다. 초등 5학년 막내의 달리기 소식이 한층 반가운 이유였다. 둘째 아이는 이제 청춘의 운동장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다. 결승선이 어디인지 알 수 없으나 최선을 다해 달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 역시 내 생의 운동장에서 열심히 달리고 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내 손에 쥐어진, 내가 이어 줄 삶의 바통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