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성이 Dec 14. 2020

지붕 위의 소

옛말에 장마가 길면 보은 색시들이 들창을 열고 눈물을 흘리고, 

장마가 짧으면 북한 관북지방 갑산 색시들은 삼(麻)대를 흔들며 눈물 흘린다 했다.

대추골인 보은은 대추가 시집갈 혼수를 마련하는 유일한 수단인데, 긴 장마는 대추를 여물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고, 반대로 관북지방에서는 장마가 짧으면 삼이 덜 자라고 흉마가 되면 삼베 몇 필에 오랑캐에게 팔려가야 하기 때문이다. 

장마(長麻)의 어원은 비가 길게 내려 키우는 마가 잘 자라주길 염원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는 기후에 따라 작물과 가축, 사람들의 생활 모습까지 지대한 영향을 받아왔다. 여름 장마로 인한 비 피해 소식이 해마다 있긴 했지만, 올해 장마는 장장 54일로 역대 최장기간으로 꼽힐 만큼 길었고 태풍이 3개가 겹쳐 큰 피해를 남겼다. 이번 여름의 길고 길었던 장마는 북극의 이상고온현상, 나아가 지구 가열의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눈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린 장맛비는 뜨거움에 몸부림치는 ‘지구의 눈물’이었다. 지구가 더 망가지지 않기를 바라는 애끓는 마음이 장맛비로 내린 것은 아닐까?


이번 비 피해 중 섬진강 범람으로 구례 양정마을 지역의 소들이 집단 폐사했다는 소식에 가슴이 아팠다.

축사가 무너지자 10여 마리의 소 떼들은 지대가 높은 구례 사성암으로 대피하고, 일부 소들은 지붕 위에서 이틀을 고립되어 있다 구출되었다. 그런데 유독 한 마리가 사람들 손길을 거부하고 꼼짝도 하지 않아 결국 마취총을 발사하여 잠든 후에야 구출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 소는 다음날 쌍둥이 암송아지를 낳았다는 기적 같은 소식을 연이어 전했다. 물 한 모금, 먹이 한 줌 먹지 못하고 지붕 위에서 이틀을 견딘 것도 대단한 일인데 출산까지 했다니 마음이 먹먹해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새끼를 품고 있던 터라 거센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버티고, 새끼를 지키려고 사람들의 구조 손길도 거부했던 것이었다. 절체절명 위기 상황 속에 생존과 생명에 대한 본능은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난리통에 출산한 어미 소와 송아지들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고 했다. 어미 소의 처절한 사투 끝에 태어난 송아지들이 건강을 회복되길 여름 내내 간절히 기도했다. 


예부터 날씨는 하늘이 주관하는 일이라 인간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기우제, 기청제, 용왕제 등 국가와 민간이 주관하는 제사가 있을 만큼 날씨는 하늘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인간들의 편리하고 소비적인 삶의 행태에 따라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고, 그 결과 이상기후가 인간 세상으로 되돌아오는 현상을 자주 접한다.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 문제로 고통받는 것은 비단 인간뿐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함께 치러내야 한다는 점이 못내 미안하다. 북극의 빙하가 녹아 북극곰의 보금자리가 사라지고, 갓 부화한 새끼 거북이 배 속에서 플라스틱 조각이 수 백개 들어있다는 소식에 절로 죄책감이 든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지구 곳곳에서 말 못 하는 동물들의 울부짐이 폭우와 태풍 속에 스며있는 듯하다.


이 안타까운 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긴 여름 장마가 끝나고 드높은 가을 하늘이 장관을 이루는 요즘이다.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와 폐허의 잔해 아래에서 희망이 꿈틀대고 있었다.  며칠 전 쌍둥이 송아지들이 건강을 회복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농장주의 헌신적인 보살핌과 어미 소의 헌신과 희생에 보답해 송아지들이 힘을 낸 모양이다.  어미 소가 사력을 다하여 새 생명을 지켜낸 것처럼 우리도 지구를 지키기 위해 힘을 다해야 한다. 다음 세대들에게 미안하지 않도록, 조금의 불편과 느림을 받아들이며 살아가야겠다. 



길고 길었던 장마 끝에 찾아온 올 가을은 하늘도, 바람도, 구름도 유난히 아름답다.

작가의 이전글 장막쇠와 괭이밥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