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도시에서 생활하기 시작할 무렵은 스무 살이 막 시작될 때였다. 한창 좋을 나이였지만 집안 사정으로 삶의 방향을 잃은 채 고개를 떨구고 방황했던 시절이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발밑을 살피며 다니는 버릇은 여전히 남아 있다.
기운 없어 보이는 걸음이지만 한 가지 좋은 점도 있다. 땅을 살피듯 걷다 보면 가끔 반갑고 놀라운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도무지 생명이 자리 잡을 수 없을 곳에서 자라는 풀들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제비꽃
괭이밥
도심 보도블록이나 건물 담벼락 사이 손가락만큼의 땅만 있으면 틈을 비집고 뿌리를 내려 마침내 생명을 밀어 올린 잡초를 보면 이상하게도 그 힘이 내게 위로를 보내는 느낌이 난다. 요즘은 길을 걷다 이름 모를 잡초를 보면 핸드폰으로 이름을 검색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저마다 불러줄 제 이름이 있다는 것, 어울리는 그 이름을 지어준 이들도 있었던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머리가 복잡하거나, 잠시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옛 산성길을 걷는다. 집 근처 남한산성에는 자주 가고, 최근 수원 화성에 다녀왔다. 도심 밖의 옛 산성 길을 돌다 보면 발끝마다 들꽃이 흐드러지고, 눈길 닿는 곳마다 잡초가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반겨준다.
정확한 계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언제부터인가 문화유적을 보게 되면 그 문화재의 가치와 솜씨, 정신보다도 먼저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 있다. 바로 그 문화재를 완성하기 위해 동원되었을 백성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고단했을 삶의 모습들이다. 찬란한 문화유산 뒷모습에 가려진 서러운 그림자라고 할까?
집권층에서는 정권 유지를 위해, 정치적인 이득을 위해, 아니면 백성을 위해, 후손을 위해 문화유산을 만들고 남겨야 할 명분과 목적이겠지만 그 원대한 역사(役事)에 동원되었던 백성들의 수고와 노력이 없었다면 그 위대한 업적을 완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규모가 크면 클수록, 공정이 길면 길수록, 그 기교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의 말 못 할 사연과 눈물과 땀들이 곳곳에 배어 있다는 생각에 고개가 절로 숙어지곤 한다. 옛 유적지를 볼 때마다 힘없는 사람들의 피눈물이 엿보이고, 지금껏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품을 팔았을까 하는 씁쓸한 맘이 든다.
역사의 흐름 안에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는 마치 화초와 잡초와 같다. 지배층이 권력과 명예와 부라는 온실 속에서 꽃을 피우기 위해 노력했다면 백성들은 모진 시련과 역경 속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질긴 생명력으로 찬란한 역사의 밑받침이 되었다. 반만년 역사 동안 그 많은 외침을 이겨내고, 시련 많은 시절을 견뎌내어 이 나라를 일구어낸 공신은 잡초처럼 굳건히, 묵묵히 살아낸 백성들이다.
잡초가 비록 농사에 도움이 되는 풀은 아니나 잡초가 있다는 것은 그 땅이 살아있음을 말하는 것이요, 잡초가 있으므로 작물들을 더 빛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남한산성은 수도 한양을 지키던 산성으로 전국 8도의 승군들의 피와 땀으로 축성한 성이다. 12킬로에 달하는 산성에 켜켜이 쌓은 돌 하나하나가 예사로이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돌을 이리저리 돌려서 맞추던 이름 없는 이들의 노고와 사연들이 돌 틈 사이사이에 겹겹이 스며 있는 듯하다.
정조가 수도 이전을 목적으로 축성한 수원 화성은 다행히 당시 동원되었던 천민들의 이름과 출신지, 노임까지 화성성역 의궤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전해져 온다. 그 이름들은 장막쇠, 고돌쇠, 임작은노미, 정큰노미,,,
괭이밥, 애기똥풀, 꽃마리, 개망초, 까마중, 원추리…. 길들여지지 않은 들꽃에게도, 있는 그대로 살아가는 민초들에게도 불릴 이름이 있었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이름 붙일 충분한 가치가 있음이요, 그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생명을 다시 한번 불어넣어 주는 일이다. 이름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삶을 존중하는 일이다.
이름 없이 살다 간 이들의 영혼으로 되살아난 잡초의 이름을 이제라도 하나씩 찾아 불러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