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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이 Feb 17. 2021

거친 세상에서 잔잔한 파도처럼 살다가다

[난주]를 읽고

모처럼 마음먹고 떠난 제주여행.

여행 일정도 딱히 없이, 행선지도 없이

달랑 소설 <난주>를 챙겨 들고 제주로 향했다.     

일주일 여행 기간 동안

아름다운 숲 ‘사려니 숲’을 혼자 걸었고

태풍 전야의 ‘모슬포 항’을 거닐었으며

비 내리는 산록로 차분히 달렸다.

    

그러나, 이번 제주 여행이 남달랐던 점은

제주 여행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서

200여 년 전 소설 속 정난주와 동행한 느낌이 들었다.

    

제주 4·3 문학상 수상작인 장편소설 '난주'

조선 후기 정약현의 딸이자 다산 정약용의 조카, 명망 있는 명문가 장녀였던 실존 인물 ‘정난주 마리아’가 주인공이다.


신유박해로 남편 황사영이 처형당하는 등  집안이 몰락한 뒤 제주도로 유배되어 관노비로 살아야 했던 비극적 인생 여정을 그려낸 소설이다.


신분 추락, 어린 자식과 생이별, 낯설고 척박한 제주에서의 하루하루 삶이 아프고도 선명하게 다가왔다.


제주 특유의 자연환경과 그에 따른 삶의 모습, 여러 번 소리 내어 읽게 만드는 제주 방언, 그 당시 역사적 사실 등 김소현 작가의 애씀이 작품 구석구석 녹아있어 작품은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사려니숲’을 내려와 버스를 기다리느라 벤치에 앉아 난주를 읽고 있었는데 숲 해설가 선생님이 다가와

“무슨 책을 그리 재밌게 읽으세요?”

“제주 배경의 <난주>라는 책인데 제주에서 읽으니 너무 재밌네요”

숲해설가 선생님과의 짧은 대화 속에서도 제주 사람들의 제주에 대한 마음은 검푸른 바다색과 같이 깊고, 제주 검은 돌처럼 상처가 촘촘히 박혀 있는 듯하다.    

 

난주의 고된 유배 일정을 곱씹으며 제주 일대를 서성거렸다.

유배지로서 제주는 참혹할지언정 제주의 풍광은 그냥 보아 넘길 수 없이 처연한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었다.

유배지로서의 제주를 생각하니 떠오르는 사람 추사 김정희!

추사관으로 향하는 늦은 오후 한가로운 2차선 도로를 만끽하다  [정난주 마리아 묘] 이정표를 발견하고는 정난주 묘 앞에서 세상에 찌든 내 부끄러운 마음을 내려놓았다.

     

젖먹이 아들을 제주 유배지까지 데려갈 수 없었던 난주는

추자도 나무에 아들을 묶어두고 읊조린 대목에서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 밀려왔다.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종국에는 흘러간다. 그늘도 음지도 해가 들면 다시 꽃을 피운다.

 지금 우리가 이러하다고 본래 이고 훗날    이렇겠느냐....

 어미는 잊기도 잊으려니와 그리워도 말거라. 사무치는 그리움은 너를 상하게 하니 차라리 그리움을 모르는 것이 나으리라. 극통한 아픔은 이 어미의 가슴에 묻고 피눈물도 어미가 흘릴 것이다. 너는 그저 울고 떼쓰며 입고 먹으며 숱한 세월을 한낱 아이로 자라거라" 


손에 닿지 않는 멀고도 가까운 그 시절 조선 후기,

정치와 정쟁, 신앙과 신념을 넘어선

평범한 이들의 선량한 일상의 힘이 작품 내내 넘실댄다.   여리고 질긴 힘이 스러질 듯하다 일어서고, 무너질 듯하다 일어나는 그 미련스러운 힘이 요즘 세상을 사는 우리와 지금의 나를 위로한다.


난주가 제주에서 보낸 37년의 시간이 더욱 빛날 수 있었던 것은

난주가 인간에 대한 성의, 배려를 제대로 바라볼 줄 아는 주변인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역사는 평범한 이들의 일상이 모여 위대한 역사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척박한 자연환경을 거스르지 않고,

중앙정부의 가혹한 요구에 순응하면서도

제주의 향과 색을 끝내 잃지 않은 제주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난주가 묻힌 제주

제주를 품은 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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