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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성이 Jun 27. 2021

반딧불이처럼 빛나는 일상

이화정 <아름다움 수집 일기 >를 읽고

책에 기대어 살아온 긴 세월 동안 책을 애정 하는 방법은 고이 아껴 보는 것이었다. 책장을 접는 일도, 줄을 긋는 일도, 메모를 남기는 일도 꾹 참고 마음으로, 눈으로 책을 보았다. 필요한 부분은 포스트잇을 붙이는 것이 전부였다.

이화정 작가의 [아름다움 수집 일기]는 이런 나의 오랜 독서 습관을 단번에 바꾸어버렸다. 2번을 연거푸 읽으면서 연필로 책 여기저기를 줄 긋고, 동그라미 치고, 메모를 적었다.



북 코디네이터 이화정 작가의 세 번째 책 [아름다움 수집 일기]는 50대를 살아가는 작가가 일상에서 길어 올린 스물일곱 가지의 아름다움을 모은 책이다.



고양이, 소품, 연필, 필사, 그림책, 그림, 사진, 물방울무늬, 시, 사람, 편지, 나이, 살림, 요가, 해독 주스, 풍경, 산책,

나무, 여행, 사전, 문학, 쌀국수, 글쓰기, 공간, 손, 눈물, 사랑


이 아름다움들은 차라리 소소하고, 소박하다. 그러나 이 소소한 아름다움은 보통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잘 보여지지도, 쉽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좀 더 낮은 자세와 겸손한 태도와 순수한 눈길이 가닿을 때 곁을 내준다. 삶과 일상을 마주하는 작가의 마음 태도와 손길과 눈길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수집이라는 제목에서 문득 돌아가신 아빠가 생각났다. 내 기억 속의 아빠는 무언가를 늘 채집하는 사람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 탐구생활 과제로 곤충채집이 있었다. 아빠는 나보다도 더 신이 나서 나무 상자를 짜고 간격을 맞추어 칸을 질러 근사한 채집함을 만들어주셨다. 그리고 그해 여름 내내 나와 아빠는 틈나면 곤충을 잡으러 나섰다. 매미, 잠자리, 사마귀, 여치, 나비, 메뚜기, 장수풍뎅이, 무당벌레, 등등을 채집했다. 징그러워하는 나를 대신해 곤충 날개에 시침 핀을 꽂아주고, 곤충 이름표를 붙여주고, 내가 채집함 상자에 이름을 적는 동안만은 지긋이 지켜봐 주셨다.

아빠의 채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계절마다 나물, 열매, 약초를 따서 삶고 말리고, 술을 담그고, 잼을 만들고, 묵을 쑤었다. 집 앞 텃밭에는 갖가지 채소를 심었고 텃밭 둘레에는 울타리 대신 꽃을 심었다. 채송화, 봉숭아, 해바라기, 다알리아, 나팔꽃을 심었다가 꽃이 시들면 씨를 모아 다음 해에 다시 심었다. 늦가을엔 떫은 감과 홍옥을 한 단지 가득 모아 두고, 무말랭이를 썰어 실에 꿰어 매달고, 겨울엔 메주를 매달아 두었다.

아빠가 삶의 무게감과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자연 채집으로 덜어내셨던 것이었다는 걸 아빠가 돌아가신 한참 뒤에서야 깨달았다.

아빠의 삶을 보고 자란 탓인지 어느덧 나 역시 누구보다도 충실한 생활인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가계부와 각종 고지서, 아이들 스케줄표, 영수증, 계약서 등은 한 치 오차도 없이 챙기며 산다. 가계부는 해마다 쌓여갔지만 내가 읽고 싶은 책 리스트는 제대로 적어보지 못했다. 세금을 연체한 적은 없지만 내가 누려야 할 개인 시간은 누누이 연체되었다. 이 역할들은 나를 온전히 잃어야 잘 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야 할 일, 해내야 할 일에 등을 떠밀려 하고 싶은 일은 미뤄두기 일쑤였다.

이대로는 영혼이 말라 부서질 것만 같던 몇 해 전부터 나를 찾아 나섰다. 산책하고, 음악을 찾아 듣고, 읽고 싶은 책을 읽고, 보고 싶은 영화를 보고, 혼자 여행을 떠나고, 북 토크에 참가하고, 시를 읊고…. 두서없이 시작된 영혼 되살리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가끔은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 이제 막 시작된 터라 감히 누구와 함께하자고 청할 여유가 없이 어설프게나마 잃어버린 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설렘에 안주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화정 작가의 <아름다움 수집 일기>에서는 일상의 조각들이 반딧불이 빛처럼 빛을 뿌리며 날아다녔다. 반딧불이가 빛으로 말하는 것처럼 작가는 작고 여린 것들에 대한 감사와 찬사로 일상을 말하고 있다. 반딧불이는 예전엔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환경오염 때문에 보기 힘들다. 그러나 오염되지 않은 청정 지역에서는 여전히 그 빛을 발하는 귀한 곤충이 되었다. 반딧불이가 온몸으로 빛을 뿜어내듯이 이화정 작가는 독자들이 일상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챕터마다 < 수집 미션 > 이라는 다정한 신호를 쉼 없이 보낸다.

이화정 작가가 최고의 시라고 소개한 시가 좋아 바로 필사했다. 그리고 가까운 지인들께 소개하고 함께 감상을 나누는 걸로 첫 번째 미션을 시작했다.


          뒤처진 새

                               이너 쿤체

철새 떼가, 남쪽에서

날아오며,

도나우 강을 건널 때면, 나는 기다린다

뒤처진 새를

그게 어떤 건지, 내가 안다

남들과 발맞출 수 없다는 것

어릴 적부터 내가 안다

뒤처진 새가 머리 위로 날아 떠나면

나는 그에게 내 힘을 보탠다



책을 읽는 내내 나와 비슷한 감정선과 시선에서는 환호를 질렀고, 섬세하고 순수한 작가의 마음에 감탄했고, 일상에 매몰되어 놓친 상황에서는 자책했고, 동시에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마 다짐했다.

설움을 달래주던 길가의 여린 꽃들과 나무들, 스쳐 지나간 바람 한 점, 떠나간 인연들, 영혼을 살 찌운 책과 음악과 영화, 충만했던 여행, 이 모든 것들에게 충분히 감사를 전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일상의 기쁨을 나날이 느낄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나 또한 일상의 소중함과 기쁨을 두루 나누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나이와 상관없이, 지난 이력과 관계없이 자신만의 생을 말갛게 꾸려갈 수 있다고 희망을 주는 책이 곁에 있기에. 언제든 힘을 불어넣어줄 언니가 있기에.


아빠의 투박하고 소박했던 채집하는 생이

내가 지금껏 살아온 힘의 무게추였다면

이화정 작가의 < 아름다움 수집 일기 >는

앞으로 감사한 일상으로 끌어올릴 지렛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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