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버거운 어른이라는 이름의 무게
어른은 그저 견디고 있을 뿐이다. 어른으로서의 일들에 바빴을 뿐이고, 나이의 무게감을 강한 척으로 버텨냈을 뿐이다. 어른들도 아프다.
-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 2화, 덕선 나레이션
얼마 전,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시작을 했다. 그 전 시리즈를 너무 재미있게 봐와서 이번 시리즈도 역시 기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응답하라 시리즈는 남편 찾기라는 큰 줄기 아래 이루어지는 사랑 이야기들도 물론 재미가 있긴 하지만, 한 화 한 화마다 다른 주제로 그려지는 그 '일상의 이야기'들이 너무 공감이 가서 더 재미있게 봤던 것 같다. 매번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라 이번엔 또 어떤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들려줄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드라마를 봤다. 1988년. 내 기억에 없는 그 시절의 이야기들. 하지만 어느 시대나 다 통하는 감정선은 있게 마련이다. 우리 내 사는 이야기가 담겨있기에 더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
2화 '당신이 나에 대해 착각하는 한 가지'
사랑하는 할머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흐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며 시골로 내려가는 삼 남매. 하지만 장례식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웃으며 어르신들과 담소를 나누는 아버지와 돌아가신 할머니에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고모들. 미국에 사시는 큰아빠는 보이지도 않는다. 덕선은 그런 어른들의 모습에 실망하고 만다.
불쌍한 우리 할머니. 할머니 불쌍해서 어떡해...
다음 날 아침, 밤새 할머니의 빈소를 지킨듯한 아버지의 모습에 덕선은 잠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내 어제와 같이 손님 맞이에 열중인 아버지. 그럼 그렇지. 덕선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아무도 슬퍼하지 않아.' 할머니만 불쌍해. 슬픔은 아마 어른들을 향한 미움으로 바뀌고 있었던 것 같다.
장례식 마지막 날 밤. 문이 열리더니, 미국에 사시는 큰아빠가 비통한 얼굴로 들어오셨다. 할머니의 비보를 듣고 먼 길을 날아오느라 그리 시간이 오래 걸렸던 것이었다.
"동일아..."
아빠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만 보였던 아빠는 큰아빠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동안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린다. 어떻게 참아왔을까 싶은 그 울음을. 고모들도 그제야 큰아빠에게 달려가 펑펑 울며 오열하기 시작한다.
덕선은 아마 그때 깨달았을 것이다. 어른이라 슬프지 않았던 게 아니라 슬픔을 꾹꾹 눌러 참고 또 참았던 것이라는 것을.
나는 괜찮아야만 하는 사람이었어서
얼마 전, 장윤정 씨가 나온 힐링캠프를 봤다. 늘 밝은 모습으로 좋은 노래를 들려주었던 그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이야기들을 조심스레 풀어나가다가 출산 당시를 떠올리며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우는 걸 싫어한다고 한다. 자신 때문에 사람들이 불편해지는 게 너무 싫다고.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기대어 본 적이 없다던 그녀는, 아이를 가지고 출산을 할 때에도 그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묵묵히 혼자 그 시간들을 참고 견뎠다. 그런 그녀가 안쓰러워 주변 사람들이 울었다고 한다. 힘들면 소리 지르고 울어도 될 텐데 그걸 어떻게 참고만 있었냐며.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도, 사람들에게 눈물을 보이는 것도, 싫었던 그녀. 다른 사람도 살아가기가 힘이 들 텐데 자신까지 짐이 되기 싫었단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참고 또 참고 그렇게 살아왔단다. 왜냐하면, 자신은 언제나 늘 괜찮아야만 했던 애였기 때문에... 그러면서 참아온 눈물을 흘리는데, 그걸 보는 나도 함께 눈물이 흘렀다. 나도 늘 난 괜찮아야만 한다며 내 자신을 타일러 왔어서 그 마음이 너무 공감이 되었던 거다.
자라는 동안 알게 모르게 '나는 우리 집의 맏딸'이라는 부담감을 안고 살았던 것 같다. 장녀의 무게란 생각보다 무거웠다. 키가 작고 유순해 보이는 아이였지만, 어릴 때부터 아빠를 닮아 깡다구가 있었다. 자존심이 강하고 지는 게 싫었고, 그러다 보니 내 속엣 얘기를 잘 꺼내질 않았던 아이였었다.
'내가 힘들면 우리 부모님이 더 힘들어하실 거야. 내가 힘들면 우리 동생들은 어떡하지?' 그런 남다른 책임감에 힘들어도 힘든 티를 잘 내질 않았고, 힘들단 얘기를 입 밖으로 잘 꺼내질 못했다. 나도 장윤정 씨처럼, '늘 괜찮아야만 하는 아이'인 줄만 알았어서.
착각은 자유지만, 오해는 금물이다
어른의 무게란 아직도 나에겐 너무나 버겁다. 언제까지나 아이일 것만 같았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른이 되어 있었다. 몸만 훌쩍 커버린 어른 아이. 우리의 내면에는 아직 아이가 자리 잡고 있는데, 문 밖을 나서는 순간 어른이라는 가면을 쓰고 어른이라는 옷을 입는다. 그리고 상처받지 않은 척, 괜찮은 척 연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여야 하는 환경에 어느 새 익숙해졌기 때문에.
어른도 아프다. 그저 어른스러워야만 했던 환경에 적응했던 것뿐이다. 그런 현실이, 참 안쓰러웠다. 겉으로 보기에 즐겁고 행복한 것 같이만 보여도 그 속이 어떻게 무너지고 있을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온 힘을 다해 살아가다가 벽에 부딪치고 힘에 겨울 때, 그땐 우리 내면의 아이가 마음껏 슬퍼할 수 있도록 잠시 어른을 벗어두고 소리 내어 울어도 괜찮지 않을까?
어른스런 아이는 그저 투정이 없을 뿐이다. 어른스레 보여야 할 환경에 적응했을 뿐이고, 착각 어린 시선에 익숙해졌을 뿐이다.
어른스런 아이도 그저 아이일 뿐이다. 착각은 짧고 오해는 길다. 그리하여 착각은 자유지만 오해는 금물이다.
- tvn드라마 응답하라 1988 2화, 덕선 나레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