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알고 내리는 봄비
한 남자가 비행기를 타고 있습니다.
말쑥한 차림의 남자의 손에는 아름다운 대나무 숲의 사진과 그가 읽던 소설책이 들려 있습니다.
기내에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흘러나오고,
사진 속 풍경을 보던 남자는 이내 사진을 책 속에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설 준비를 합니다.
영화는 흰 와이셔츠의 말쑥한 비즈니스맨
‘동하(정우성)’ 의 도착으로 시작됩니다.
혼란하고 시끄러운 중국 사천성
청두(成都) 의 한 공항에서 말이죠.
자욱한 연기와 번잡한 사람들.
주인공 '동하' 를 마중 나온 지사장님(김상호) 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줍니다.
하지만 그의 귀에는
지사장님의 말이 들어오질 않습니다.
당최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는 차들 때문이었죠.
그는 벌써부터 반쯤 혼이 빠져버립니다.
중국의 어지러움을 단단히 느끼고 있을 즈음에,
지사장님은 동하에게 또 다른 시련을 안겨줍니다.
바로 맵기로 소문난 사천요리 먹이기였습니다.
도착하자마자 호되게 당하는 주인공,
싫다는 내색도 하지 못하고 겸연쩍게 웃기만 합니다.그런 그에게 호방한 지사장님이 이야기합니다.
"박 팀장님,
이 곳 사천에는 네 가지 유명한 것들이 있어요.
첫째는 사천미인,
둘째는 팬더,
셋째는 사천술 이구요,
마지막은 이 사천요리 입니다."
호되게 신고식을 치르는 동하는 이제
조금씩 중국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지사장님의 안내에 따라
청두 시내를 돌아보는 주인공.
사실 그가 오고 싶었던 곳이 있었습니다.
비행기 안의 사진의 장소,
<두보초당> 이 그곳이었죠.
봄의 기운이 완연한 초당은 대나무로 가득합니다.
아름다운 풍경에 취하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서 그의 시선이 멈추게 됩니다.
바로 동하의 유학 동기였던 여주인공,
'메이(고원원)' 가 그곳에 서있었기 때문이었죠.
푸른 대나무가 어우러진 조그만 초당,
두 남녀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 짓습니다.
부드러운 봄바람에 꽃잎 하나가 날려
메이의 머리 위로 앉습니다.
그리고 사천성의 아름다운 봄날은
시작되려 하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메이,
그녀는 이곳에서 시인 '두보' 를 연구하며,
마지막 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회사원이 되어있는 '동하'
중국에서 연구원으로 살고 있는 '메이'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고향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운명이 준 우연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동하는, 메이에게 다시 보러 오겠노라 말을 하고 떠나갑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둘은 다시 만나 오래되었던 이야기들을 꺼내며 즐거워합니다.
동하가 주고 간 '자전거' 를 버렸다고 말하는 메이.
왠지 그런 메이가 동하는 섭섭하지만,
옛날의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다시 즐거워합니다.
건설장비를 세일즈 하기 위해 온 동하,
그는 이 곳 청두의 구석구석을 돌아보게 됩니다.
지사장님의 안내로 시내의 여러 곳들을 돌아보게 되면서, 그의 눈에는 보지 못했던 도시의 장면들이 하나씩 들어오게 됩니다.
바로 그를 이곳으로 오게 만든 사건인 <원촨대지진> 의 장면들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2008년, 커다란 지진이 이곳 사천성을 덮쳤고 69,000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진 이후에 복구장비들의 수요가 늘어, 동하의 회사는 큰 호황을 맞았지만, 아직도 이곳 시내 곳곳은 무너지고 부서져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죠.
시내의 무너져버린 모습들을 보며
가슴 한 구석이 편치 않은 동하.
지사장님은 동하에게 이 곳의
참상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리고 장면은 바뀌어 메이는 인상 좋은 '마부장(마소화)' 에게 마지막 논문 검토를 받고 있습니다.
논문이 마무리 되어감을 확인한 부장님.
갑자기 일상 이야기를 하던 둘의 분위기가
심각하게 변해갑니다.
고개 숙인 메이를 보며 마부장이 이야기합니다.
"메이야, 두보가 그랬단다.
사람의 마음속에 모든 것을 담고 갈 수
없다고 말이야."
그런 부장님을 보고 웃으며 메이가 이야기합니다.
"두보는 그런 말 한적 없잖아요."
이제 동하의 출장도
마지막을 향해 다가가고 있습니다.
<두보초당> 밖에서 메이를 기다리는 동하.
문 밖으로 나오는 그녀에게 주인공은
오래도록 연습해온 말을 건넵니다.
"워샹니 (我想你, 보고 싶었어요)"
한가득 웃음을 터뜨리는 메이.
마치 오랜 시간을 같이 있지 못해 아쉬웠던 듯,
두 사람은 마지막 청두에서의 데이트를 즐깁니다.
분주하던 공원의 사람들 사이로
같이 두 손을 마주 잡고 춤을 추던 주인공들,
그들의 머리 위로 시원한 봄비가 내립니다.
이내 사람들은 비를 피하려 급히 자리를 피하고,
그들도 봄비를 피해 작은 지붕 아래로 들어갑니다.
"好雨知時節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리네...) "
하늘을 보며 메이가 말을 합니다.
동하의 시를 좋아하던 메이,
그런 메이에게 일상에 묻혀 이제,
시를 쓰는 법을 잊어버렸다고 말하는 동하.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둘의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은 깊어가고,
이제 조금 있으면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남은 시간은 짧게만 느껴집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걸까?
꽃이 피어 봄이 오는걸까?"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메이가 이야기합니다.
두 연인의 이야기는 이제 어떻게 흘러갈까요?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리고,
꽃은 피어 봄이 왔음을 알리고,
봄비는 이제 두 연인의 마음을 서서히 적셔 갑니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봄입니다.
다른 영화 리뷰를 할까 생각하다가, 창 밖에 내리는 비를 보며 이 영화가 생각이 났습니다.
호우시절,
좋은 비가 내리는 시절.
(영화의 제목은 두보의 시,
<춘야희우> 의 첫 구절에서 가져왔습니다)
이 영화는 한중 합작영화에 해외 촬영이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담백합니다.
최대한 한정된 공간에서
소수의 배우들로 스토리를 풀어간다고 할까요?
어떻게 보면 빈약해질 수밖에 없는 볼거리의 영화,
하지만 영화 곳곳에는 사천성의 아름다운 풍경들이 가득합니다.
호된 신고식을 치르던 첫 장면에서
지사장님이 말하던 사천성의 4대 명물,
사천미녀, 팬더, 술, 음식 ...
이 모든 것들을 영화 화면에 넣어 이야기를 진행합니다.
더하여 슬픈 기억인 '사천성 대지진' 역시,
영화를 풀어가는 중요한 사건으로 만들어 넣는
잘 짜여진 구성을 보입니다.
조금은 평범한 이야기를 영화는 풀어갑니다.
유학시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남녀가
다시 운명처럼 재회합니다.
그리고 변해버린 서로의 상황들을 확인하며,
그들의 감정은 다시 시험대에 오르게 되죠.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감독님의 취향일까요?
(허진호 감독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에서 보이던 섬세한 연인들의 감정선이 이 영화에서도 보입니다)
하지만 전작과는 다르게,
이런 섬세한 감정 하나하나를 표현하는 배우들의 조금은 어색한 모습들이 보입니다.
왜 그럴까 ....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스크린 속의 두 배우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국적이 다른 두 사람,
제3의 나라의 말로 감정을 소통해야 하는 연인들.
사랑의 감정은 영어로 전하고,
아쉬움의 감정은 본인들 나라의 말로 이야기합니다.
그러기에 사랑의 표현은 조금 아쉽고,
토라지는 모습들은 더욱 귀엽게 보입니다.
어쩌면 다른 공간과 세상에서 살아온 연인들의 현실적인 모습은 저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답답하고 이해하기 힘든 점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설레며 끌리는 그런 느낌 말이죠.
영화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먼 거리', '통하지 않는 언어', '현실적인 생활터전'..
많은 온오프 라인의 사랑을 조언하는 이들이 피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런 현실적 제약들에 대해 말이죠.
그리고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정녕 만나야 할 인연들 사이에는 장애물이란 있는 걸까 라고 말이죠.
그리고 '두보' 가 있습니다.
사천성에서 말년을 보낸 두보,
그의 일생은 불우했지만 이 곳 사천에서
그의 시는 꽃을 피웁니다.
마치 아름다운 봄날을 만난 것처럼 말이죠.
동하와 메이는 '시' 라는 공감대 로 이어져 있습니다.
시를 사랑한 한 남자와,
그 남자의 시를 사랑했던 한 여자.
그 둘은 오래전 한 시인이 머물렀던 장소에서
다시 재회를 합니다.
수 백 년 전 봄날,
내리는 봄비를 보며 즐거워한 시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때를 알고 내리는 봄비를 보며 즐거워하는 두 연인이 있습니다.
그런 두 연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갑자기,
영화 속의 대사가 그렇게 들려왔습니다.
"그가 있어 사랑이 찾아온 걸까?
사랑이 있어 그가 찾아온 걸까?"
봄날의 비가 대지를 적시고,
부드러운 바람이 조용히 밤하늘에 스며들고,
세상 만물을 소리 없이 푸른색으로 물들입니다.
<< 춘야희우 >> - 두보 -
好雨知時節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리네,
當春乃發生 이번 봄에도 찾아왔네.
隨風潛入夜 부드러운 바람, 살금살금 밤에 찾아와
潤物細無聲 세상 만물을 소리 없이 물들이네.
野徑雲俱黑 들판에 구름 어둡게 깔려있고
江船火燭明 강 위에 배들 불빛만 홀로 비치네.
曉看紅濕處 어스름 새벽녘 붉은빛 바라보니
花重錦官城 금관성(성도)에 꽃들이 활짝 피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