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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사랑 이야기

첫 눈이 올때면

by Le Studio Bleu

- 최근 제 브런치에서 사진을 도용하여 쓰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사용에는 문제가 없으나 출처를 꼭 밝혀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사진 어떻게 보여요?"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눈이 맑은 선생님이 우리에게 말했다.

언어영역 선생님이 얼마간 자리를 비웠다.


학원에선 선생님이 없는 동안

다른 선생님을 잠시 모셔왔다.


검은 얼굴에 남자치곤 조그만 키,

통통한 몸에 선해 보이는 눈망울이

안경 뒤로 빛나는 선생님이었다.


항상 조용하고 조심하던 선생님이,

교과서에 나온 첫눈에 대한 시를 읽다가

갑자기 질문을 해왔다.


조그만 사진 한 장을 선생님이 우리 앞에 놓았다.


단발머리를 한 밝은 얼굴,

옛 되어 보이는 두 여자분의 얼굴이 보였다.




"어려 보여요."


우리들이 하나씩 이야기를 했다.

나는 눈치를 살피며 선생님에게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빛이 바래가는 인화사진을

지갑 속에 늘 가지고 다니는 것 같았다.


너덜 해진 사진 끝을

소중히 코팅해서 조심스레 꺼내는 모습.

나는 단박에 사진 속의 사람이

그에게 소중한 누구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파 보이진 않아요?"

선생님이 다시 물어왔다.


우리와 조금 나이차가 있을 선생님은

그래도 꼬박꼬박 존대의 말로 우리를 대해주었다.


다시 사진을 바라보았다.


아프다고 하기엔 둘 다,

너무나 밝은 미소를 가진 예쁜 사람이었다.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이에요."


책을 덮곤 선생님이 갑자기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는 선생님의 얼굴을 바라본다.


"둘이서 오더니 사진을 찍어달래요."


선생님의 사랑이야기.


아직은 푸석한 남자 고등학생인 우리는

어리둥절해하며 선생님을 보았고,

한참 관심 많을 여학생들은 눈을 반짝이며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을 찍어주고 가려는데,

말을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으로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번호를 달라고 이야기를 했죠."


차분한 선생님의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여학생들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다음 이야기를 재촉하는 것처럼.


"셋이서 저녁 먹고,

전화번호 교환하고 헤어졌죠.

그리고 서울에서 다시 만났어요.


누구냐고요?

오른쪽에 있는 사람이에요."


사진의 오른쪽에는

더 어려 보이는 여성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했어요?"


다급해진 여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물어본다.

누구나 꿈꾸어 봄직한 여행지에서의 사랑 이야기.


"네."


수줍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선생님의 말에,

다시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선생님은 혹여 원장 선생님에게 들릴까,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데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는 졸업반 학생이었고,

그때 집사람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곤

바로 직장에 다니고 있었거든요.

제주도에서 만나고 얼마 안 있어,

졸업하고 결혼했어요.

신혼여행은 다시 제주도로 갔구요."


나는 선생님을 보며,

'저 샌님 같은 분도 사랑에는 용감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의 사랑 이야기가 우리 수능 진도랑 무슨 상관이란 말야? 아무튼 결혼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제 이야기는 끝일 것 같다.


나는 책을 펼치려고 했다.


"그리고 아내가 떠나가곤

여기로 내려와 여러분들을 만나게 되었네요."


술렁거리던 교실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우리는 모두 사진에서 눈을 떼곤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담담하게 선생님은 이야기했다.


"아내가 마지막 날,

병실 침대에서 저를 부르더니 이야기 했어요.

'한 번만 안아 달라고...

처음 만났을 때처럼.


두 번 안으면 당신 놓고 못 떠날 것 같으니

한 번만 안아달라고...."


차분한 목소리로 그렇게 이야기하는 선생님을 보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에 첫눈이 내리던 날 저녁,

스팀 소리만 가득 울리던 작은 병실에서,

선생님은 그렇게 사랑하던 사람을 떠나보냈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를 빼닮은 딸과 함께

어머니가 계신 부산으로 내려오셨다고 했다.


부산에서는 서울처럼 '눈' 을 볼 일이 많이 없어서,

그래서 좋다고 조용히 말씀하셨다.



동피랑의 아름다운 거리를 거닐며,

사진기 속에 사랑스러운 연인들을 담다가

서울에 첫눈이 내렸다는 문자를 친구에게 받았다.


카메라를 내려놓곤 문자들 확인하면서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선생님의 모습이 떠올랐다.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모든 것이 녹아내려 버렸을 때,


솜털보다 가벼운 눈 한송이도 내 어깨를 짓누를 수 있음을, 선생님은 우리에게 말해 주셨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럴 때면,

빛바랜 사진 한 장에 남아있는 그녀의 미소를 보며, 아무렇지 않게 세상을 향해 웃음 지을 수 있는

그런 사랑의 모습도 있다는걸,


선생님은 어린 우리들에게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눈이 싫다던 선생님의 어린 딸이 컸다면,

아마 저 연인들과 비슷한 나이가 되지 않았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지에서 저렇게

손을 마주잡고 사진을 남기는 아이를 보면서,


선생님도 이제는 다시

눈을 좋아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제는 시간이 어루만져 아물었을 그 마음이

갑자기 시리진 않도록 조금씩 그렇게

하늘에서 눈이 내려 주었으면...


(통영, 동피랑 마을에서)

그런 사랑 이야기 (동피랑 마을에서본 연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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