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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빈 May 12. 2020

눈을 감으면 비로소 보이는

르 토로네 수도원

 정말이지 시에스타는 스페인에나 있는 줄로만 알았다. 점심도 못 먹고 마르세유에서부터 열심히 달려왔건만 이 작은 마을에는 우리 부부 허기를 달래줄 빵 한 조각 살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나마 문이 열려있는 식당들의 주방은 불이 꺼진 지 오래고 저녁 장사 전까지는 재료마저 없단다. 아무래도 오늘 점심은 굶게 생겼다. 시계는 이제 막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한낮의 찜통 같은 더위속에 체력만 허비한 채로 터덜터덜 차로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커피나 물 말고, 음식을 주세요...


 시동을 걸자 내비게이션이 남은 길안내를 다시 시작했다. 최종 목적지였던 르 토로네 수도원(Abbaye du Thoronet)까지는 겨우 5km 만을 앞두고 있었지만 목적지 부근 지도상에는 눈 씻고 봐도 식당은커녕 작은 건물 하나 없음이 분명했다.


 수도원 기행 중에 한 끼 제대로 챙겨 먹으려던게 과한 욕심이었을까. 무슨 욕심으로 이 더위에, 이 작은 시골마을까지 아내를 데리고 와 밥도 못 먹여가며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르 토로네 수도원을 향해 액셀을 마저 밟기 시작했다. 어쩐지 옆자리에서 입을 꾹 닫은 아내가 걱정되고 자꾸 마음에 걸렸다.


수도원 입구에 세워진 안내 표지판


 르 토로네 수도원은 프로방스의 울창한 계곡 속 물가를 부지 삼아 1176년에 지어졌다. 일부러 찾아오지 않으면 쉽게 알아채기조차 어려울 작고 검박한 수도원이다. 이곳이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 까닭은 다름 아닌 라 투레트 때문이다. 당시 르 코르뷔제에게 '라 투레트 수도원'의 건축을 의뢰했던 주임신부 '앙투안 리옹(Antoine Lion)'은 그에게 '르 토로네'에 방문하길 강권하며 이를 참조하여주길 부탁했다. 이미 당대의 건축가로 이름을 날리던 코르뷔제에게 어쩌면 불편한 부탁일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기꺼이 '르 토로네'를 방문했고 그 영감을 살려 마침내 현대 건축의 걸작으로 꼽히는 '라 투레트'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이번 휴가는 전적으로 '라 투레트'를 보기 위해 계획되었다. '라 투레트' 탄생 비화를 알고 나니 자연스럽게 '르 토로네'를 방문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사실상 리용에서 출발하여 니스로 이르는 일정 전체가 두 수도원을 차례로 보기 위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오오... 수도원 입구에서 간이매점을 발견했다!


별것 안 들었지만 정말 감사히 맛있게 먹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도착한 수도원 주차장에는 천만다행으로 간이매점이 하나 있었다. 바게트 빵을 슥슥 반으로 갈라 치즈와 생햄을 넣은 샌드위치를 두 개 시켰다. 그 마저도 마지막 남은 빵 한나를 반으로 잘라 만든 것이었다. 허기를 달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상황이었지만 맛 또한 대단히 좋았다. 곡기가 들어가자 아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오솔길, 마음이 평온해진다.


 배를 달래고 나니 이제야 다른 감각들이 하나둘 살아나기 시작한다. 입구에서부터 르 토로네로 이르는 길은 몇 번의 건축적 장치들을 자연스럽게 거치며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지형의 높낮이라던지 작은 계단과 담, 측면으로 돌아서며 들어서는 문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제법 넓은 대지를 거치며 수도원을 찾아 들어가는 여정이 자칫 지루하거나 단조롭지 않도록 섬세하게 조정되어 있었다.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작고, 한 발짝 물러나 있다.


목재문, 돌벽, 마당, 그림자...


 '라 투레트'와 '르 토로네' 중 무엇을 먼저 방문하는 게 좋을까. 나의 대답은 '순서는 상관없으나 반드시 두 곳을 모두 방문할 것'이다.


 물리적인 거리도, 시간적인 배경도 너무나 먼 두 건축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공간, 조형, 재료를 막론하고 묘하게 닮은 듯 닮지 않은 듯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을 따라가 보는 즐거움이 대단했다. 르 토로네의 돌벽에서 느껴지는 치밀함은 라 투레트 콘크리트의 세장한 조형에서도 느낄 수 있었고, 라 투레트의 회랑에서 느끼던 음악적 리듬감은 르 토로네의 육중한 창을 통해서도 분명 들리는 것만 같았다.


회랑, 창, 빛...


채 다듬지 않은 기단, 툭 삐져나간 돌벽, 고르지 못한 높이의 계단... 하지만 결코 어설프지 않다.


 회랑에 꽤 오래 걸터앉아 있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태양의 고도가 조금씩 변화하며 회랑 안으로 공간을 찢으며 들어오는 빛의 표정도 조금씩 달라졌다. 이따금씩 하늘을 지나는 구름에 따라 선명도가 변화하는 그림자의 끄트머리를 주시하는 것도 질리지 않았다.


 두 눈의 감각에 이끌려 건축을 음미하던 찰나, 별안간 눈이 아닌 두 귀를 가득 메우는 청아한 멜로디에 신경을 빼앗겨 버렸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홀린 듯 따라가니 회랑 한 구석으로 붙은 경당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검박한 경당의 공간


 성가였다. 탁함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청아하고 맑은 소프라노의 음색이 그야말로 경당 전체를 가득 채우고도 남아 창으로, 문으로, 새어나가고 있었다. 살며시 눈을 감고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한 사람의 성대에서 나와 경당의 구석구석을 어루만진 음파는 내 귀에 이르러 그 공간에 대하여 빠짐없이 소상하게 일러주고 있었다.


 아름다운 곡조가 끝이 났다. 분명 들어올 때 눈으로 일일이 확인하고 거쳐온 길이건만 어떻게 다시 돌아 나왔는지는 그 장면들은 희미하다. 오히려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 나뭇잎과 벽 따위에 부딪어 부서지는 소리, 마사토를 밟는 잔향이 퍼지는 공간의 경계 따위의 감각에 의지해 길을 찾은 것만 같다.


빛, 어둠, 그림자, 리듬...


 허기를 달래니 눈이 트였고, 눈을 감으니 비로소 공간이 들렸다. 이번 휴가를 떠나기 전 다시 읽어본 승선생님께서 열다섯 해 전에 쓰신 르 토로네 기행문에는 소리와 관련된 구절이 딱 한번 등장한다. 돌의 검박함과 정교함, 빛과 그림자에 대해 묘사하던 글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고 있다.


이 회랑에 붙은 작은 방으로 들어가면 돌의 한 부분을 정교히 도려내어 흘러 들어오게 한 빛이 이 속세인의 가슴으로까지 들어오는 듯하다. 애잔하기 그지없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성서에 기록된 바처럼 마치 돌들이 일어나 찬양하는 듯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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