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Mindweller
Aug 13. 2020
엄마의 공연이 있는 날, 모처럼 이른 퇴근을 하고 광화문으로 나왔다. 공연 시작까지는 한 시간이 남았고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아 공연장 주변을 서성였다. 분주히 퇴근하는 사람들과 단체로 견학 온 어린애들과, 각기 다른 사연을 안고 걷는 이들이 거리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30년을 넘게 골목 한가운데 자리하던 일본 음식점이 텅 비어있었다. 자주 드나들진 않았지만 오랜 친구를 잃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가슴 한편이 시렸다. 허전함 때문이었을까, 우연히 발견한 증명 사진점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좁은 공간에 붙어있는 오래된 누군가의 사진을 보며, 어쩌면 오늘, 이 시간에 해야 할 일은 지금 내 모습을 찍어두는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 해가 저물고 있었다. 화장을 한 얼굴은 하루치의 노동으로 인해 번들거리고 있음이 분명했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사진을 찍는 거지, 좀처럼 즉흥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 나 자신을 정당화하며 조심스레 어둑한 사진관 안을 들여다봤다. 사진사로 보이는 여인은 컴퓨터 모니터 안에 큼지막한 한 여자의 사진을 손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사진사의 곁에 화면 속 여자로 추정되는 사람이 서 있었다. 실재하는 그 여자는 모니터에 뜬 그녀의 얼굴에 깊이 몰입하며 사진사가 그녀의 얼굴을 다듬어주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라면 용기를 내어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녀들을 지켜보고 서 있었다. 그들이 사진관 문 앞에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하기까지는 긴 호흡을 몇 번 들이쉬고 마실 만한 시간이 걸렸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사진사는 사진 찍으러 오셨어요, 라고 건조하게 물었다. 나는 마치 잘못을 하다가 들킨 학생처럼 작은 목소리로 네, 라고 대답했다. 무슨 사진 찍으실 거예요. 오늘 그녀는 이같은 질문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몇 번이고 했을까. 그렇지만 대체로 이런 질문을 들을 리 없는 나는 예상질문 목록에 없던 물음을 받은 사람처럼 잠시 멍하니 있었다. 더 생각해봤자 고민이 더 길어질 것 같아 “기본 반명함 사진이요”라고 대답한다. 앞 손님은 이 장면을 말없이 지켜본다. 거기 물건 놓고 여기 앉으세요. 아, 네. 들고 있던 가방을 자리에 놓고, 나를 기다리는 작은 의자로 향한다. 어느새 사진사는 웬만한 여성이 거뜬히 들기는 버거워보이는 큰 DSLR 사진기를 손에 들고 나를 향해 서 있다. 머리 그렇게 하고 찍으실 거예요?라는 그녀의 말을, 나는 머리를 조금 손보고 찍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로 이해하여 멀지 않은 벽에 걸린 거울로 재빨리 향한다. 이렇게 하시면 머리가 생각보다 부하게 나와요. 그녀의 목소리는 피곤하지만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깃들어 있었으므로 나는 결코 친절하지 않지만 그녀가 고마웠다. 오른쪽 머리를 최대한 뒤로 넘긴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여전히 사진가로서 피사체가 완전히 단정하지 못하다는 느낌을 떨쳐내지 못한 그녀는 앞으로 풍성하게 쏠려 있는 내 왼쪽 머리를 두 갈래로 나눠 반을 뒤로 넘겼다. 됐네요, 자 고개를 좀만 이쪽으로 돌려볼까요. 순식간에 다시 카메라를 쥐고 있는 그녀는 손을 쭉 펴고 손가락을 일자로 모아 칼날 모양을 만든 채 손의 무게중심을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손을 따라 내 고개는 오른쪽으로 조금 기울었다. 너무 갔어요, 조금만 왼쪽으로. 다시 그녀의 손을 따라 나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셔터를 몇 번 누른다. 사실 이 모든 상황은 사진기의 셔터가 눌리는 순간만큼이나 빠르게 일어났다. 상황에 적응하는 데 익숙지 않은 기질 탓인지, 나는 약간 얼어있던 것 같다. 자 조금만 웃어볼까요. 그래, 증명사진은 예쁘지 않아도 활짝 웃는 게 잘 나오는 거지. 경직된 안면근육이 긴장을 한 탓인지 좀처럼 올라가지를 않았다. 인위적인 미소라도 지어 보이는 일이 버겁게 여겨졌다. 열린 문 밖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걸어다니고 있다. 입꼬리는 여전히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다행히 그 사이 사진사는 만족스러운 한 컷을 건졌나 보다. 네 됐습니다. 사진이 인화되는 데는 20분 정도가 걸린다고 했다. 공연이 시작하기까지는 아직 30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엄마가 방금 전화로 알려 준 ‘김밥을 맛있게 먹는법’이라는 김밥가게에 들러 김밥 한 줄을 시켰다. 좁은 김밥집 안에는 커다란 기계에 ‘매장’,‘포장’이라는 두 문구가 떠있었다. ‘매장’ 버튼을 누르고, 참치김밥을 누른 뒤 카드로 결제를 했더니 영수증과 번호표가 나온다. 자리를 잡고 앉아 물을 뜨는데 나보다 앞서 온 할머니는 왜 자꾸 카드가 안 되지, 라며 혼잣말을 했다. 그녀는 카드를 반대 방향으로 투입하고 있었다. 나는 카드를 돌려 끼워줬고, 그녀는 그 장면을 신기하듯 바라봤다. 얼마 전 한 백반집에 있던 기계의 현금 투입구에 카드를 넣어 애를 먹었던 기억이 스쳤다. 어쨌든 기계 덕분에 ‘김밥을 맛있게 먹는법’의 조리사들은 김밥만 충실히 만들면 되었다.
먹는 둥 마는 둥 ‘김밥을 맛있게 먹’지 못하고 황급히 문을 나섰다.20분이 흘렀고, 사진사는 기다렸다는 듯 내 사진이 담긴 누런 종이포장지를 내밀었다. 어쩐지 그 안에서는 사진을 확인하면 안 될 것 같은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종이봉투를 받아 들고는 재빨리 문을 나섰다.
20분의 시간 동안 사진관을 오갔을 몇 명의 사람들이 컴퓨터 모니터에 큼지막하게 떠있었을 내 얼굴이 변형되는 장면이 상상되어 더욱 황급히 발길을 서둘렀다. 그리고는 사진관으로부터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조심스레 사진이 담긴 봉투를 열어 즉석으로 찍힌 증명사진을 확인했다. 오늘의 내 모습을 추억할 언젠가를 상상하며 나는 괜한 그리움에 취했던 것 같다.
비밀이 없는 인생은 가엽고 불쌍한 것이라는 말을 어떤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나는 작은 비밀 하나를 만들었다는 데에 흡족해하며 다시 사람들 틈으로 들어갔다. 바람이 시원한 유월의 수요일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