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태백에서 만난 독일 여성 스테파니
독일에서 돌아온 어제 오후부터 줄곧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잠에 취하다 깨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늘 그러하듯, 여행은-특히 긴 여행일수록- 돌아온 뒤에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그자리에 있는 일상을 다시 마주할 때의 당황스러운 감정을 견디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마냥 즐거운 과정만은 아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나마 이번 여행은 엄연한 업무수행의 일부였으므로 적어도 개인적 시간과 공간을 누릴 자유를 되찾았다는 사실만으로 여행 후유증을 절감시키고 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으로 연결되는 기다란 통로를 지나며 나는 어린시절 환승하기 위해 잠깐 스쳤던 피지섬의 축축하고 더운 공기를 느꼈다. 한여름이 지나가려면 아직 몇 주의 시간이 남은 칠월의 중순이다. 친구는 내가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듯 번개가 치고 스콜현상이 자주 있었다고 했다. 날씨는 분명 사람의 기분을 좌우한다. 특히 좋은 날씨에서 긴 여행을 다녀온 나같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날씨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정신에 결함이 있거나 지나치게 낭만주의자이거나, 이 두 가지라는 말을 어떤 단편소설에서 본 기억이 있다. 약물을 복용할 정도로 심한 정신병력이 있는 건 아니니까, 아마 나는 지나치게 낭만을 추구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새벽의 초입인 지금, 창문 밖에서 고요하게 내리는 빗소리가(더 정확히 말하자면 비가 나뭇잎과 땅에 떨어지면서 내는 소리가) 한여름밤의 시원한 공기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이 시간을 나는 온전히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몇 계절 전, 태백에 있는 한 기도공동체에서 나는 백두대간을 홀로 등산하다 길을 잃은 독일인 여성을 만났다. 게르만 민족 답게 키가 유난히 컸던 그 여자는 그 공동체에 당시 머무르는 사람 중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몇 없었으므로, 필연적으로 나와 만나게 되었다. 공동체 설립자의 딸은 공동체 원칙을 위반하며 길 잃은 그녀를 하룻밤 머무를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고 내게는 날이 밝으면 그녀와 대화를 좀 나눠보라고 권유했다. 일 년에 한 번, 꼭 그 계절만 되면 그곳을 찾아 침묵의 시간을 보내던 나는 날이 밝고 그녀와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이름은 스테파니었다. 스테파니는 독일에서 국제변호사 일을 하다가 우연히 한국에 매혹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 올 계획을 세운 뒤 홀로 이곳에 와서 산행을 하던 중이라고 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독일인답지 않은 스테파니는 유난히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고 당시 내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던 주제에 성의껏 경청해주기도 하며 굉장히 소녀스러운 면모를 풍겼다. 나는 태백의 깊은 골짜기에 있는 작은 방에서 그녀와 마주앉아 차를 나눠 마시던 그 짧은 시간이 좋았다. 나보다 서너살은 많은 언니뻘이지만, 어쩌면 언니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그 언니를 언젠가 다시 만나고 싶고,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스테파니 역시 그걸 바란다고 했고, 대화가 마무리 된 뒤 그녀는 씩씩하게 갈 길을 갔다.
그 뒤로도 우리는 가끔 연락을 주고 받으며 안부를 묻곤 했다. 스테파니는 한국의 산과 들과 바다에 큰 감명을 받은 듯 했다. 종종 내게 아름다운 풍경이라며 사진을 보내오기도 했다. 계획대로라면 그녀가 하이킹을 마칠 즈음 우리는 서울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삶의 불가항력적인 사건은 마치 우리가 처음 조우했던 우연처럼 예측할 새 없이 찾아오기도 했다. 스테파니는 마치 19세기 영국 여인이 격식을 갖춰 편지를 쓰듯 메신저라는 21세기의 가벼운 플랫폼 안에서도 내게 늘 형식을 갖춘, 그리고 품격이 담긴 메시지를 보내오곤 했다. 그녀는 내게, 그녀의 부친이 급작스럽게 작고하여 모든 여행을 중단하고 베를린에 돌아가 가족을 돌봐야 한다고 했다. 한 개인으로 겪을 수 있는 최대의 위기와 슬픔 앞에서마저도 스테파니는 절제된 언어로 조곤조곤 귓가에 속삭이듯 내게 그 소식을 전했다. 우리의 만남은 그런 방식으로 유예되었다.
충격적인 그 일이 있고 몇 달이 흐른 뒤, 나는 회사에서 하고 있는 일이 마무리되면 그 결과물을 시연하기 위해 잘하면 독일에 갈 수도 있다는 말을 상사로부터 들었다. 그는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지나치게 섬세한 구석이 있는데, 그때도 그는 내게 마치 소녀가 친구에게 사사로운 일을 중대한 비밀을 말하듯 이 소식을 전했다. 일이 커질 거라는 예감에서 오는 불안과 독일을 공짜로 여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데에서 오는 기대가 얽혀 나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던 것도 같다. 평소에 내 반응 하나하나를 매우 민감하게 포착해내는 상사는, 왜, 좋으냐? 싫으냐?고 하며 특유의 유난스러운 호들갑을 떨었던 것도 같다. 회사 일이라는 게 가기 전까지도 틀어질 수 있는거다, 라며 간접적인 권위를 행사하는 그의 말 때문에 나는 독일행 비행기 티켓을 끊기 전까지만해도 정말 독일에 갈 거라는 확신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출장이 확정된 시기에 나는 다시 스테파니에게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스테파니는 아버지의 부고 이후 특히 슬픔에 잠긴 어머니를 돌보며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가 없는 건 어떤 느낌일까,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가장 역할을 하고 있는 그녀의 삶의 무게가 느껴져 왜인지 모르게 그녀가 더욱 나보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어른같았다. 스테파니는 독일에서의 상황이 안정되면 곧 다시 한국에 올 거라고 했다. 이번에는 내친 김에 일본도 둘러본다고 했다. 나도 신이 나서 이번 독일 여행-혹은 출장- 소식을 전했고, 아쉽게도 내가 독일에 가 있을 동안 그녀는 일본에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다행히 일본여행 후에 한국에서 몇 주간 머무를 계획이라고 하여 우리는 잠정적으로 내가 출장을 다녀온 뒤 서울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아쉽게도 이번 여행에서 베를린은 잠시 거쳐가는 장소였다. 어차피 베를린에 스테파니가 있어도 나는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여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그래도 스테파니를 다시 만날 때 서로가 공유하는 지점이 조금이라도 더 생겼으니까, 더 즐거울 것 같았다. 그만큼 나는 독일의 크고 작은 도시와 마을에 여기저기 머물렀다. 여행이 마무리되어갈 즈음 그녀로부터 짧은 편지같은 연락이 왔다. 편지에는 생각보다 빨리 일본여행을 끝냈다는 말과, 내가 예전에 언급했던 한국의 전통공연을 추천해달라는 말과, 내가 한국에 돌아오고 이틀 뒤에 서울을 떠난다는 말이 담겨 있었다. 중요한 사실은, 시차가 큰 여행지를 다녀오면 나는 늘상 시차적응을 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거였고, 그렇기때문에 이번의 만남을 위해서는 내 편에서 애써 노력을 가해야 한다는 거였다. 그러나 이번에 만나지 않으면 그녀를 오래도록 볼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에, 그리고 아버지의 부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애도하고 싶은 마음에 나는 체력의 임계치를 넘어 무리한 약속을 잡았다.
다행히 돌아온 다음날은 금요일이었고, 나는 아껴둔 휴가를 썼다. 나는 금요일 오후를 제안했으며 해방촌 어귀에 있는 도자기공방에 가는 그녀의 일정에 맞춰 그 근처에서 만남을 갖기로 했다. 금요일 오전은 비몽사몽 간에 지나갔고 날은 돌아온 날보다 덥고 습했다. 굳이 만나지 않아도 되지 않나, 친밀하고 깊은 관계 외에는 굳이 집착하지 않는 기질과 맞지 않는 선택을 한 것 같아 조금은 후회가 되기도 했다.
해방촌이라는 동네가 풍기는 분위기를 좋아한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검열받지 않아도 되는. 그래서 내리쬐는 더위 속에서도 우리는 자유롭게 대화하고 사진을 찍고 공방에 들러 그녀가 일 년 전 만들었다는 도자기 그릇을 찾았다. 공방으로 가는 길은 정말이지 너무나 가팔라 마치 백두대간을 등산하는 것만 같았다. 스테파니는 어린 시절부터 친한 친구와 동행했고 저녁은 지인을 통해 알게 된 중앙대 교수와 식사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스테파니는 교수를 만나 자기소개를 할 때 한국 이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그 말을 할 때 그녀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지으며 행복해했다. 그녀는 모험적인 이름을 바란다고 했고, 그녀의 친구는 전통적이지만 트렌디한 이름을 짓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들에게도 내게 어울리는 독일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서로의 이름을 지어주는 일은 생각보다 흥분되는 일이었다. 새로운 언어로 이름을 만들어낸다는 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는 것과 같으며 창조된 세계 안에 또다른 내가 태어나는 일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겨졌기 때문에. 그렇게 스테파니는 '채연'이, 채연의 친구는 '소희'가 되었다. 그렇게 부르고보니, 정말 채연같고 소희같았다. 그들은 방금 만들어진 그들의 새로운 정체성을 신기하고 멋지다는 듯 받아들였다. 나는 독일적 방법으로서는 'Julia'가 되었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미국식 발음인 '줄리아'가 아니라 '율리아'라고 불러야 한다는 거다. 그들은 율리아는 아름다운 이름이고, 그게 내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며 만족해했다.그렇게 우리는 한국인이, 독일인이 되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시시콜콜한 놀이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정말이지 우리는 깔깔대면서도 진지했고, 고심 끝에 얻은 이름을 소중하게 받아들였다.
해방촌 골목 꼭대기에서 우리는 작별인사를 하고 베를린에서의 만남을 기약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해방촌 어귀에 있는 작은 책방에 들러 문학잡지를 손에 들고 나왔다. 그 덕분에 홀로 침잠하여 여행의 후유증에 시달릴 틈 없이 글로 허전함을 달랠 수 있게 되었다. 독일로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고 또 오래도록 계속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3년 전 여름에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