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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dweller Sep 11. 2020

어떤 편지

나는 정말로 익명의 타자들에게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받곤 한다.

믿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정말로 익명의 타자들에게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받곤 한다.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Take me to Paris'라는 문구가 박힌 옷을 입은 여성을 지나치면서 회사 선배가 "다음 휴가 때는 유럽에 꼭 가라"라고 말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몇 걸음 지났을까, 회사와 역을 잇는 무빙워크의 끝자락에서 마주친 다른 여자의 옷에는'Dear L.A. I love you'가 적혀있다. 왜 잘살고 멋진 도시로만 여행을 가라고 할까, 이상하게 심술이 난다.



영원히 원을 그리며 순환할 것만 같은 2호선 열차에 오른다. 엄마, 마음적으로 고통받으면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연연하지 마요. 수화기 너머의 어머니에게 말하는 여인의 목소리는 애원에 가깝다. 그래, 나는 딱 오늘만큼의 고통,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억압과 무기력만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열차의 스피커로 앳된 남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이 열차를 운전하는 기관사가 두 명이란다. 나는 가끔 이 많은 이들을 싣고 가는 긴 열차의 주인은 정작 어둠 속에서 늘 혼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 때 얼굴도 모르는 그를 안쓰러워하곤 했다. 그래서 이 열차의 기관사가 한 명이 아니란 그의 말은 내게 일종의 위안을 준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무의미해 보여도 그 날들이 모여 의미를 이룬다고 믿습니다.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고객님을 응원합니다.” 매일 같은 길을 오가는 일상에 익숙해진 삶에도 무심하게 고작 깊은 숨을 한번 내쉴 뿐이었던 나를 달래주는 그가 고맙다. 그는 여린 마음을 지녔을 것만 같다. 그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어쩌면 그는 자신에게 하는 말을 우리 모두 앞에서 한 걸지도 모르겠다. 매번 같은 어둠을, 꼿꼿이 선 채로 결연히 뚫고 같은 길을 가야만 하는 그 자신에게 말이다.


당신이 일하는 이유는 돈인가요? 뭐니 뭐니 해도 money가 최고라고요?

옆에 앉은 양복 차림의 남성이 종이를 넘긴다. 그가 그러쥔 제안서 제목이 너무 커서 자꾸만 눈이 간다. 그는 노골적으로 내게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본능적으로 그에게서 도망치듯 일어나 문에 기대어 선다.


거기에는 중년의 남성이 꾸벅꾸벅 졸며 몇 시간 남지 않은 1월의 첫 월요일을 버텨내고 있다. 왼쪽 팔에 나침반 모양 아플리케가 달린 두꺼운 점퍼를 입은 그의 아랫입술은 그의 점퍼만큼이나 두껍다. 잠에서 깬 그는 스마트폰에 얼굴을 밀착시켜 노래 재생목록을 넘긴다. 그의 손이 멈춘 곳에 '내가 살아갈 이유'라는 곡 제목이 있다. 어쩌면 그는 여느 사람들처럼 그저 오늘을 살아내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 그의 고통은 권태였을까? 억압이었을까? 스스로를 위로하듯 그가 살아온 오늘을, 얼마 남지 않은 1월의 첫 월요일을, 머지않아 맞이할 내일을 다독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걔 죽었잖아. 간하고, 여기저기 아파서 고생하다 죽었어. 하나하나 가네. 한 노인은 마치 내게 얘기하듯 수화기 너머에 대고 말을 한다. 죽었다니. 새해의 첫 월요일 밤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죽음이라니. 죽음 앞에선 그것이 지루함이든, 억압이든, 그것을 견디는 일조차 무력해지고 말 것이다. 견딜 수 없음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견딤도, 견딜 수 없음도 효력을 다하지 못하는 죽음의 순간 앞에서야 나는 나를 비로소 직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자꾸만 나의 죽음을 유보한다. 내일도 여전히 그다음 날, 그다음 날의 다음날을 계획하면서. 어떻게든 나를 직면하기로 한다. 어쩌면 그 일이 이 해의 유일한 의미일지도 모르니까. 헐벗은 몸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워 온갖 것들로 덮을 수밖에 없는 처량한 우리들 속의 나는 열차에서 내린다.


작년 1월의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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