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살이 감지하는 일상의 감각,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는 능력
할머니를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좀처럼 몸은 움직여지질 않았다. 어제 꽃 수업하고 한아름 받아온 알록달록한 꽃들을 나 혼자 누리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할머니는 꽃을 좋아하시니 분명 내가 꽃을 들고 가면 두배로 좋아할 거란 걸 직감했다. 다행히 꽃들은 아주 시들지 않았고 그것들을 감쌀 비닐도 더럽지 않았다. 나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어제 재활용 쓰레기통에 넣어둔 비닐을 다시 싱크대 위에 폈다. 구김이 있긴 했으나 제법 새것 같았다. 배운 대로 쥐딱나무 잎대를 중심에 두고 같은 방향으로 45도씩 돌려가며 꽃을 덧대었다. 할머니는 꽃을 유난히도 좋아하신다. 나는 할머니에게 줄 꽃을 만들며 그 사실을 다시 상기시켰다. 누군가를 생각하며 그를 위해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하고 벅찬 일이다. 나는 할머니가 좋아할 거 같은 색을 조합하며 신중히 다발을 만들다가, 그냥 모조리 다 넣었다. 같이 사는 이가 아쉬워하지 않을 만큼만의 꽃을 남기고 나니 큰 꽃다발이 완성됐다. 배운 대로 꽃들의 높낮이를 조절하고, 비슷한 색을 그룹으로 자연스럽게 배치한 뒤에 꽃단을 노끈으로 꽉 묶고, 마지막으로 꽃들을 비닐에 감싸 묶었다. 내가 마치 플로리스트가 된 것 같았다. 아름다운 재료가 그런 생각을 불어넣어 준 것 같았다.
꽃다발을 만들고 나니 이젠 이 식물들이 시들지 않게 최대한 빨리 가져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할머니 집까지의 긴 거리를 기어이 택시를 타고 갔다. 택시 기사님께 좀 더 빨리 탈 수 있는 정류장으로 가있겠다고 말씀드리려 전화를 했다. 기사님은 전화를 받을 때 "네 아무개입니다."라고 하셨다. 당당하게 자기 이름을 밝히는 택시 기사님을 만나본 적이 없다. 분명 이분은 품격이 있는 인격일 것이다.
택시가 왔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기사님께서 그래도 도로에 서 계시면 위험해요, 라는 말까지 들을 지경이었다. 택시에 타서 꽃다발을 조심스럽게 옆좌석에 두고 할머니한테 전화를 했다. 할머니는 수신음이 울리고 나서도 한참 후에 전화를 받으셨다. 숨이 차보이고 어딘지 밖인 것 같았다. 할머니는 서울역에 있는 치과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너무 지쳐서 잠시 동네 근처 복덕방에 앉아계신다고 했다. 할머니 그런데 나 그렇게 오래 있진 못할 거 같아. 그럼 언제 오는데? 40분쯤 더 걸릴 거 같아. 빨리 갈게요. 아..그러냐? 대답하는 목소리에 못내 아쉬운 마음이 묻어났다.
할머니 집에 거의 다다랐다. 할머니한테 꽃 드리려고 그러세요? 기품 있는 기사님이 묻는다. 네. 할머니가 정말 좋아하시겠어요 꽃 받으시면. 네 할머니가 절 키워주셨거든요. 곧 할머니의 행복한 얼굴을 볼 수 있겠다는 마음에 5월의 오늘 날씨처럼 기분이 들떴다.
할머니는 문을 열고 막 집에 들어가시려는 참이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달려가 할머니를 꽉 안고 내가 준비한 꽃다발을 안겨드렸다. 할머니는 두 손을 모아 소녀처럼 기뻐했다. 나는 할머니가 꽃을 들고 있는 사진, 나랑 같이 꽃을 든 사진, 꽃병에 꽃을 꽂은 사진을 찍었다. 할머니는 꽃이 너무 좋다고 하시며 이걸 너가 만들었냐고 너무 대단하다고 꽃 배우는 거 정말 잘했다고 거듭거듭 말하셨다. 꽃은 보고만 있어도 너무 좋아.
할머니는 올해 아흔 살이 되었다. 할머니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보고, 감탄할 줄 아는 능력이 있다. 이거 내가 키우는 사랑초잖아, 벌써 이만큼이나 자랐다 얘. 발간 색깔이 너무 이쁘지 않니? 이런 말을 할 때는 세월이 겹겹이 덮여 안개진 할머니의 눈이 안쪽부터 빛난다. 그래서 할머니와 꽃은 잘 어울린다. 집에 돌아가는 나를 보고 끝없이, 힘차게 손을 흔들어주던 할머니가 벌써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