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이어가 아닌 감독이 되자
기획자라는 타이틀을 지녔다면 내가 예상했던 범주 밖의 일들을 많이 접하게 될 때가 있다. 할 일도 넘쳐나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일을 더 건네주는 상사 또는 동료가 있다. 특히, 개발팀은 개발하느라 바쁘다며 귀찮은 일은 다 나에게 떠넘기는 것만 같다. 그럴 때 이런 생각이 든다.
하, 이것까지 내가 해야 되나?
맞다. 솔직히 내가 그들의 심부름꾼 되려고 기획자 한 것도 아닌데 뭐만 하면 정리해달라, 미팅 잡아달라, 업체에 확인해달라 등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들 시켜댄다. 손이 없어 뇌가 없어, 그냥 자기가 정리하면 되지 왜 그런 거까지 내가 정리해줘야 돼? 싶다. 이해한다. 나도 여전히 그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이렇게 잡다하게 일하려고 기획자가 된 게 아닌데, 하찮은 업무들 때문에 내 본업에 충실하지 못하게 되는 것만 같다. 정말이지 이런 처사에 속이 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기획자는 잡다한 일을 하려고 있는 존재도 아니지만 프로젝트를 혼자 진행할 수 있는 능력도 솔직히 없다. 암만 기가 막힌 기획서 100장을 써본들, 구현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는 종이일 뿐이다.
프로젝트는 여러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서비스를 위해 달리는 일이다. 어벤저스처럼 각자의 영역에서 특화된 능력들을 모아서 하나의 목표를 위해 마음껏 발휘한다. 그 안에서 기획자는 전체적인 그림을 관할하고 서로의 갈등을 풀어주고 때로는 전쟁(?)에 참전하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쳐내야 한다. 그 안에서의 기획자는 '캡틴아메리카' 같은 역할이라고나 할까.
잘 들여다보자. 어벤저스 일원은 다들 뭔가 저마다의 초능력 기술들이 있다. 그러나 인간인 캡틴은 비브라늄으로 만들어진 방패가 없으면 죽을 수 있는 위험이 - 물론 초인적인 정신력과 신체능력 등 캡틴도 거의 초능력자로 보는게 맞지만 - 그나마 높은 편이다. 기획자에게도 나를 지켜주는 '비브라늄 방패'가 필요하고 그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많이 아는 것'이다.
개발자는 개발의 완성도로 힘을 갖고 디자이너는 디자인으로 힘을 갖는다. 기획자는 감독의 역할을 갖게 되는데 프로젝트를 제대로 감독할 때 힘을 갖게 된다. 때문에 다른 프로젝트 일원들보다 이 서비스에 대해 전체적인 그림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이걸 왜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올바르게 가이드를 해줄 수 있고 목적에 맞게 방향이 잘 가는지 체크하면서 흔들리지 않게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낼 수 있다.
내가 이 프로젝트에 대해 그 누구보다 많이 알게 되고 힘을 갖는다면 제 아무리 뛰어난 실력자가 감독의 자리를 탐하려 해도 뺏을 수 없다. 5살 아이에게 주는 맛있는 저녁상을 차리는데 육아에 대한 지식이 없는 프랑스 유학파 셰프 따위가 필요 하겠는가.
잡일처럼 느껴지고 하찮게 느껴지는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실제로 하찮은 것은 아닐 확률이 높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많이 알기 위해서는 프로젝트와 관련된 대부분의 문서정리는 기획자가 하는 것이 기억하는데 도움이 된다.
API통신 가이드나 개발 연동 문서가 아니라면 정책서, 회의록, 체크리스트 등 프로젝트 진척을 위해 필요한 명세는 기획자가 관리하는 것이 본인뿐만 모두에게 좋다. 무조건 다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필요한 도구들이라면 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근데 여기서 하나의 문제에 봉착한다. 나는 이런 문서들의 정리 말고도 화면도 설계해야 하고 메뉴명 선정부터 콘텐츠까지 해야 될게 엄청 많다는 것. 그럴 때 필요한 게 '우선순위 가지치기'다. 수많은 업무를 나열하고 우선순위로 해나가야 한다.
'정리할 것'이라는 타이틀을 하나 지정해서 정리해야 할 업무들을 싹 넣어두고 업무를 하면서 여유가 되거나 필요시 꺼내어 조금씩 정리를 해나가며 미션을 수행하면 된다. 그러나 일하다 보면 이거 진짜 지금 시점에 정리를 꼭 해야 되나 싶은 일들이 생긴다. 자신의 욕심에서 나오는 정리 욕구일 수도 있고 프로젝트 일원이 요청했거나 때로는 타 부서에서 요청할 수도 있다. 목록이 쌓여가면 판단이 흐려질 때가 생긴다.
그럴 때 써먹으라고 있는 게 선배고 팀장이다. 평소에 생각보다 이들은 딱히 써먹을 게 없을 때가 많은데 교통정리에는 아주 최적으로 세팅되어 있다. 그러니 판단이 흐려지거나 어려울 때는 주저 말고 물어보자. 세상에 '질문'만큼 필요한 정답을 필터링해내는 좋은 도구는 없다. 제 아무리 뛰어난 자비스라 할지라도 우선순위는 주변의 환경을 타는 것이기에 이해관계자에게 물어보고 빠르게 판단하는 편이 현명하다.
R&R(Role and Responsibility), 역할과 책임을 말한다. 회사를 다니면 이 놈의 R&R을 정립한다는 것 때문에 네가 하네 내가 하네 말이 많다. 일 떠넘기는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이 녀석에 상당히 집착한다.
프로젝트에서 역할(Role)이라는 것은 자신이 해야 할 업무가 맞지만 책임은 다르다. 프로젝트에서 R&R은 통용되는 범주를 나누는 것뿐 해야 할 Task를 완벽하고 명확히 나눈다는 의미가 아니다. 책임은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성하기 위해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을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기획자가 이것까지 해야 하냐'는 질문은 프로젝트의 리더 역할은 하고 싶은데 문제를 해결하는데 힘쓰긴 싫다는 말과 같다.
기획자도 분명한 스킬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전 글에서 말했다. 그러나 여러 명이 함께 업무를 하는 경우 무조건적으로 문서의 구조화에만 집중한다는 것은 어리석다. 때로는 자질구레하거나 반복 작업이 필요한 일에도 투입하여 목표한 일정을 맞추고 완성도를 높이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한다.
또한 타 부서 사람들이 자신의 영역을 조금 침범했다고 해서 너무 공격적으로 나서지도 말자. 이래라저래라 하며 사용자 운운할 때가 있다. 그럴 땐 데이터나 타 서비스 벤치마킹을 통해 레퍼런스를 찾아 보여줘야 한다. 그 사람들은 감독이 탐나서 월권행위를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보다 그들은 그 권한도 책임도 갖고 싶어 하지 않는다.
미국 사람이 비빔밥의 모양만 보고 버터를 준비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을 때 고추장과 참기름이 필요한 이유를 잘 설명해주면 되는 거다. 그러니 안심하라. 그들은 생각보다 진지하게 묻는 것도 굉장한 답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의 사고 안에서 납득하고 싶은 거다.
기획자는 프로젝트의 감독이다. 때로는 외롭게 싸우고 있다는 느낌이 들더라도 우직하게 견뎌내자. 그리고 머리에 프로젝트에 대해 그게 무엇이든 넣자. 나중이 되면 프로젝트에 대한 방향과 목적, 제반사항을 가장 많이 아는 사람에게 결국 의지할 수밖에 없다. 감독은, 기획자는 그렇게 일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