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가 안드로메다로 갈 때
최근에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로 분주하다. 아직 브레인스토밍 단계라 이런저런 아이디어들을 더하고 빼가며 큰 뼈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프로젝트에 관여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여러 의견 중 하나를 빠르게 결정해주는 결정권자가 있는 것이 좋은데 주로 상사일 확률이 높다. 이때 결정권자는 반드시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의견을 내기보다 듣는 것이 중요하다. 하고 싶은 말도 많을 테고 반박하고 싶은 마음도 이해하지만 방향이 너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게 아니라면 그 입을 좀 다물고 있는 것이 프로젝트 일원 모두에게 좋겠다.
하루는 어김없이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자리인데 결정권자인 누군가가 여러 가지 기능적 아이디어를 쏟아낸다. 개중에 몇 개는 고개를 끄덕일 만큼 좋은 제안이었지만 몇 개는 터무니없이 멀리 간 이야기였다. 당장 전부 하자는 것은 아니라는데, 단순 의견이라기에는 진행 상태를 묻는 횟수가 너무 잦은 게 문제. 결정권자는 그 기능이 전부 담기면 완전한 서비스가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여기서 함께 생각해보자. 상사의 말처럼 다양한 기능을 때려 넣고 자유도를 열어주는 것이 과연 사용자들에게 Awesome! 을 외칠 수 있는 '완벽한 서비스'가 될 수 있을까?
일이 점점 커질 때 생각해야 할 것 하나,
프로젝트가 갑자기 산으로 바다로 안드로메다로 커지는 가장 큰 이유는 목적을 잃어서다. 얘기하다 보니까 이것저것의 기능이 있으면 좋겠고 경쟁사 분석을 하다 보니까 그것도 필요해 보인다. 유사 서비스 사용자 반응을 체크해보려니 불편하다는 것은 편하게 만들어주면 좋겠고 이왕이면 사이트가 이쁘면 좋겠어서 디자인 레퍼런스를 열심히 뒤진다. 기술적으로는 가능한가 궁금해서 개발자를 찾아간다. 이것들을 모조리 정리하다 보니 문서가 개판이다. 문서의 인덱스부터 다시 갖춰야겠다.
제발 그만! 그 발걸음을 멈추라. 우리가 프로젝트를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잃으면 안 된다. 왜 이 서비스를 만들려고 했는지를 가능하면 아주 잘게 생각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꼭 필요한지 먼저 정하고 스케치를 해야 한다. 그 외 부수적인 생각은 일단 접어두고 제발 시작부터 하자는 것이다.
말이 좀 어렵다면 이렇게 얘기해보겠다. 술을 아주 왕창 먹은 다음날, 해장이 필요해서 라면을 끓이려고 한다. 대충 보이는 냄비에 적정량의 물을 넣고 라면에 준비된 면, 라면수프를 넣은 뒤 끓인다. 맛이 심심하다면 파송송 계란탁 정도 추가하면 완벽하다.
해장을 위한 라면을 끓이는데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냄비를 찾아내고 맛을 더 풍성하게 해주는 소시지나 만두 따위의 부속품, 푸드스타일리스트나 할 법한 그릇의 배치와 같은 테이블의 완성도는 필요 없다는 것이다. 왜? 해장이 목적이니까. 내게는 그냥 해장할 수 있는 끓여진 라면, 그것이면 된 것이다.
일이 점점 커질 때 생각해야 할 것 둘,
어떻게 시작은 했는데 이번에는 '꼭 필요한 기능'이 생각보다 너무 많다. A라는 기능을 붙여보려고 하니 B라는 기능이 있어야 되고 C라는 기능이 붙으면 좀 더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것도 잠시 그만~ 기능 확장이 답은 아니다. 무작정 기능만 갈아 넣는다고 좋은 서비스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추려내는 일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보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을 위해 그림 그리기 서비스를 만들 거다. 그림을 그리는 펜, 지울 수 있는 지우개, 색칠을 할 수 있는 색연필, 작업을 되돌리거나 다시 번복하는 undo/redo 그리고 그림 저장 기능이 필요하다. 그런데 출시 일정이 다가온다면? 일단 '그림 그리기' 행위를 위한 펜, 지우개, 저장만 먼저 제공한다. 색연필과 undo/redo는 필요하지만 조금 늦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생활 속 예시로 결혼을 한다고 치자. 해야 할 리스트가 엄청나다. 먼저 결혼식장을 잡아야 될 거고 양가에 인사도 올려야 한다. 청첩장 마련도 필요하고 스드메 예약도 필요하고 등등해야 할 일이 태산이다. 어느 정도 양가 합의가 됐다면 결혼식 날짜부터 잡는 것이 우선이다. 청첩장을 찍거나 식장을 예약하려고 해도 날짜가 있어야 뭐라도 할 것이 아닌가.
다양한 아이디어를 내는 브레인스토밍 단계를 패스하라는 말이 아니다. 초기단계에는 그래도 괜찮다. 근데 이미 프로젝트가 시작했는데도 계속 의견만 확산시켜서는 안 된다는 거다. 나의 뇌에서 넘쳐나는 아이디어로 너무 힘들거든 따로 저장해 두라. 목표한 일정은 다가오는데 이게 무슨 땅따먹기도 아니고 사고를 대체 어디까지 확장시킬 셈인가.
일이 점점 커질 때 생각해야 할 것 셋,
우선순위까지 잘 따져서 해야 할 일이 정해졌는데 또 충돌 나는 지점이 바로 타깃이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 보면 두 가지 측면에서 늘 고민하게 되는데 고객과 회사의 방향이다. 이 둘의 방향이 다르면 설득하는 과정이 매우 고생스럽다. 우리는 회사원이니 회사의 방향에 맞추는 것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내가 기획자라면 결과적으로 서비스를 사용하는 고객에게 초점을 맞춰 기획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기획자는 내가 첫 번째 사용자라 생각하고 기획을 진행해야 한다. 나부터 어려운데 고객들이 그것을 쉽게 느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나 혼자 사용자도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가끔 일을 하다 보면 사용자는 나처럼 '이럴 것 같아서' 기획을 하는 경우가 있다. 가설은 기획의 중요한 장치지만 가능하면 데이터를 기반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현명하고 여의치 않다면 시장의 반응과 고객의 소리를 검색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찾아내야 한다.
가설보다 데이터(또는 고객의 소리)가 중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상사가 터무니없는 방향을 제시할 때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이기 때문. 안타깝게도 상사들은 '내 생각에는 이게 좋아'라고 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여기고 말한다. 그리고 그만의 정답은 고객을 대변하는 의견이 아닐 확률이 높다. 안 그래도 할 일 많은데 그를 설득하는데 에너지를 왕창 소비하는 것보다 사용자가 누구인지, 고객의 소리가 어떤지 기반으로 설득하면 설득이 수월할 것이다.
일하다 보면 상사가 생각하는 것이 나도 이해가 되면서 서비스에 담아내면 좋을 것도 같고 상사로부터 좋은 평을 들을 것 같을 때가 존재한다. 그런 때를 정말 조심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만드는 서비스이지만 '우리만 사용하는' 서비스는 아니기 때문이다. 죽이 척척 맞으면 참 좋은 징조지만 그럼에도 꼭! 이것이 우리 말고 사용자에게 필요한 것인지를 한 번 짚고 넘어가는 것이 안전하다.
일이 점점 커질 때 생각해야 할 것 넷,
프로젝트가 참 이상한 게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는 시점이 되면 꼭 사용성 오류가 보인다. 그 오류를 들여다보면 다시 좀 더 완전하게 갖춰서 내보내고 싶은 욕심이 스멀스멀 생긴다. 시스템적 관점에서 검토를 하고 섬세하게 분석해서 보완한 뒤 목표했던 일정을 미루자는 얘기가 나온다. 그렇게 수많은 검토와 분석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막바지가 되면 이유모를 완성도에 집착을 하게 된다.
여기는 생각이 조금 갈리겠지만 개발 소스의 심각한 결함이 아니라면 배포(출시)를 강행하는 것이 좋다. 오픈 일정을 미루는 것보다는 현재 상태로 배포를 먼저 하고 고객의 반응과 우리가 예상한 사용성 오류를 살핀 뒤 보완해가는 것이 안전하다.
왠지 여기만 살짝 고치면, 여기에 부가기능만 들어가면 사용성 문제도 해결될 것 같겠지만 경험상 아닐 확률이 매우 높다. 프로젝트처럼 큰 규모 개선이라면 약간의 사용성 수정으로 인한 또 다른 수정이 반드시 필요하게 마련이다. 막바지가 되면 전체적인 흐름보다 문제가 발생한 지점에 집중하기 때문에 생기는 사고의 오류인데 참아내야 한다. 시스템 코어 부분에 문제가 없다면 약간의 사용성 문제는 배포하고 수정해도 늦지 않다. 감히 말하건대 세상에 완벽하게 만들어진 서비스는 없다.
앞서 얘기한 것은 배포하면 끝이니까 참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픈을 하고 나서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문제를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오픈 직전에는 그렇게 완성도에 집착하더니 오픈하고 나서는 남의 집 자식 취급을 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매우 경계해야 하는 태도중 하나다. 적어도 내가 그렇게 애정을 갖고 오픈한 서비스라면 막바지에 집착했던 완성도를 갖춰갈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서비스의 방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마무리가 아름다운 기획자가 되자.
서비스에 다양한 기능을 왕창 때려 넣는다고 해서 사용자는 서비스가 완벽하다고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때문에 모든 단계에서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용자(고객)에게 꼭 필요한'것을 잘 속아내는 것이고 추가적으로 필요한 기능은 점점 보완해나가자.
기획자가 좋은 서비스를 만들어내는 것은 프로젝트의 전체적인 중심을 잘 잡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서비스에 대한 애정으로 욕심이 많아지는 것은 기획자로서 매우 당연하고 모범적인 모습이지만 좋은 서비스의 결과는 - 적어도 회사에서는 - 개인의 혁신적인 사고보다는 협력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모든 프로젝트가 이에 해당하지는 않겠지만 내가 투입된 프로젝트가 안드로메다로 가는 것 같으면 위의 요소들을 한 번씩 되새겨 보자. 너무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는지, 나와 상사를 중심으로 방향을 설정한 것은 아닌지 등 중심을 잃지 않고 끝까지 프로젝트를 멋지게 잘 마무리하기를 바란다.
다 점검해봤는데도 이상하게 일이 점점 커진다면? 흠... 그것은... 행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