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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채용 제안을 거절했다.

회사는 내가 선택한다.

by 달하

전날 먹은 술 때문에 속은 너덜너덜, 머리는 지끈지끈한 상태로 출근하는 매서운 추위의 아침. 카카오 알림 하나가 눈에 띈다.


ㅇㅇ, 플랫폼 기획 면접 제안의 건(강남사옥)


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도 모르는 나의 이력서가 여기저기 흩뿌려져 헤드헌터나 회사들에서 채용 또는 면접 제안 연락이 종종 올 때가 있다. 이번에도 역시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는데 기업명이 남다르다. 술 때문에 동태 같았던 눈알이 총명해진다. 지금까지 감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회사, 주린이들의 최애주로 불리는 그 회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부분이 아는 바로 그 대기업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Oh, my gosh!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이 점점 강조되면서 이커머스 업계 인력에 대한 수요가 많아졌다고 '카더라통신'을 통해 들어왔다. 개고생 하며 버틴 보람이 있구나. 살다 살다 이런 날이 나에게도 오는구나! 사실 채용, 면접 제안만 놓고 봤을 때 나와 같은 경력직이라면 크게 놀랄 일은 아니다. 최근에도 여러 이커머스 기업들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고 이런 회사도 IT부서가 있나? 싶은 회사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다.


채용을 제안해 오는 여러 회사들 중 큰 회사들의 이름이 적혀있더라도 큰 감흥은 없었다. 과거 잠시 대기업 타이틀에 취해 그깟 개목걸이 하나 지켜내겠다고 고군분투하며 시궁창 같은 삶을 살았던 좋지 않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회사의 규모는 내게 큰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번 회사는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기업명이 너무 남달랐다. 클릭을 안 해볼 수가 없었다. 제안한 업무 내용과 협의 요건들을 확인하는데 동공이 흔들린다. 업무야 어딜 가든 비슷한 내용으로 올 것이고 지금까지 왔던 채용, 면접 제안과 다른 것이 하나 눈에 띈다. '연봉'이다.


그 어떤 거센 바람에도 마음이 동요되거나 흔들리지 않았었다. IT회사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에서 지인이 오겠냐는 기회를 건네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늘 '협의'라는 단어로만 보던 항목, 연봉에 금액이 찍혀있다. 나 같은 일개 직장인 나부랭이가 받기에는 고액이다. 아, 흔들린다.





왜? 나는 흔들리는가



이 고민, 필요 없어지는 회사!

직장인에게 보람을 주는(?) 회사에서 항상 아쉬운 돈. 나를 속물이라 칭해도 할 말 없다. 나를 비롯한 많은 직장인이 오로지 급여로만 살아가기에는 버거운 시대가 됐다. 때문에 많은 직장인들은 주식에 목메고 부동산을 공부하며 한 푼이라도 허투루 쓰지 않으려 적금을 들곤 한다. 단 2%의 이자라도 챙겨야 하니까. 대출이나 마이너스 통장은 이미 물아일체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 이 회사, 월급뿐 아니라 인센티브가 엄청 유명한 회사다. 개고생 1년 해서 못해먹겠다 싶을 때, 매년 초가 되면 통장에 월급 제외하고 인센으로만 몇 천만 원씩 찍힌다고 하더라. 나도 인간이라 솔깃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까놓고 얘기해서 에이전시만 가도 그 개고생, 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거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영혼 한 번 갈아 넣어볼까 싶다.


나의 기존 글에서 돈 때문에 흔들리지 말라고 쓴 적이 있겠지만 아주 잠시 취소한다. 아무래도 외벌이가 되니 돈에 좀 더 집착하게 되는 것 같다. 안 그래도 아이가 커가며 돈 쓸 일이 많을 텐데 연봉이라는 항목에 찍힌 액수, 인센티브 소문의 금액. 내가 이 회사에서 개고생 하며 몇 년을 버텨야 받을 수 있는 금액일지 가늠이 안된다. 흔들린다.



가치

회사명 보고 이직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것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런데 확실히 이 회사는 회사명 하나로, 그 가치만으로 마음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회사다.


대한민국에 사는 많은 부모님들이 자식들의 입사를 한 번쯤 꿈꿔보는 회사일 거다. 부모님만 그럴까, 대학생도 마찬가지다. 토익이나 OPIc처럼 이 회사의 채용시험은 대학생 대부분이 경험한다. 혹시나 운이라도 따를까 싶은 마음에 나도 응시를 했었지만 역시나 탈락의 고배를 맛보았다. 될 리가 있나.


대학입시처럼 재수, 삼수가 존재할 정도로 집착하게 되는 선망의 회사다. 어떻게든 입사라도 하게 되면 인생 성공했다고 파티를 열 정도니까. 이 회사 출신이라는 이력만으로 사람을 달리 보기도 하고 심지어 이력을 이용해 돈을 버는 사람도 있더라. 그만큼 기업명 자체만으로 엄청난 가치를 갖고 있는 회사다.


그렇게 누구나 한 번쯤은 꿈의 문턱에 들였던, 마음을 품었던 그 회사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어찌 안 흔들릴 수 있는가?



그럼에도 제안을 거절했다.


벌써 아련... 잘 가 고마웠어.


가족들에게 제안이 왔다는 사실과 거절을 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남편은 그래도 그럭저럭 이해를 한다. 남편 주변에 실제 이 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을 보면 썩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게다가 내가 나이가 좀 있다 보니 들어갔다 하더라도 1~2년 하다가 버티지 못하고 관두기라도 하면 그게 더 문제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인생 길게 봐야 한다고.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현명한 남편이다.


그러나 부모님은 나를 보는 시선이 다르다. 미쳤나 저게? 하는 눈치다. 입 밖으로 미쳤다는 소리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돈 때문에 고생해본 기억들이 있으시니 당연하다. 애써 개고생 하는 것보다 낫다며 나를 이해한다는듯한 말을 건네셨지만, 계속 아깝다는 말씀을 하신다. 사실 내가 나의 부모님 입장이라고 해도 그런 회사에서 연락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거다. 얼마나 아깝겠는가. 저 망나니가 말도 안 되는 회사의 제안을 받았으니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기업 로고가 찍힌 명함을 드리고 싶은 생각이 살짝 들지만 그 일개 종이 따위를 획득하기 위해 미래를 바칠 수는 없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내가 진짜 미친 건가 싶기도 하다. 나 따위가 감히 올려다보기에는 너무 큰 회사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결정을 한 데는 3가지 이유가 있다.




사람

회사에는 '미친놈 불변의 법칙'이 늘 존재한다. 회사에 미친놈이 없다면 그 미친놈이 바로 나라고 한다. 그만큼 정상적인 사람이 온전하게 살아가기에 절망적인 곳이 회사다. 그러니 퇴사가 꿈이라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하물며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 모인 그 집단에 미친놈이 하나만 있을 리가 없다.


우리 회사도 분명 미친놈이 있다. 그러나 내가 함께 미래를 그리는 동료 중에는 없다.(아.. 혹시 그 미친놈이 나?) 무튼 이게 참 중요하다. 일이 아무리 빡세고 더럽고 치사해도 고통과 아픔을 나눌 수 있는 동료가 있다는 것. 함께하는 사람과의 합이 잘 맞아떨어지는 것. 천운을 타고났다고 자부할 정도로 지금의 환경에 만족한다.


또한 합리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고 대화가 통한다. 이 단순한 이유만으로 이 회사는 아직 다닐만한 회사다. 일도 다들 너무 잘한다. 다닌 지 6년이 됐는데 아직도 배워야 할게 넘치고, 배울 사람도 충분하다. 상사의 결정은 대체로 융통성 있고 합리적이며 의심의 여지가 별로 없다.


기계처럼 일하고 효율이 무시된 채 일하는 사람을 잘 견디지 못한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건가 싶을 정도로 뇌를 사용하지 않는 인간들과 함께 일하기 싫다. 물론 그 회사에서도 지금만큼 좋은 환경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확률상 희박하다. 그 도박을 걸어볼 만큼의 확신이 서지 않는다.



지금 회사에서 하는 업무의 만족도가 높다. 어느 정도 '업종'이라는 식별이 생긴 뒤부터 줄곧 이커머스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다른 업종에 있더라도 관심을 놓지 않았고 지금 운 좋게 이커머스 기획자로 전환한 지 7년이 됐다.


현재 회사는 계속 성장하고 있고 회사가 그리는 미래에 나도 확신을 갖고 일한다. 업계 생태계를 만드는 작업에 일조하고 있는 것이 피부로 와 닿고 앞으로 해야 할 것들이 눈에 보인다. 7년의 시간에 지루할 틈이 없었을 정도로 즐거운 이 모험을 아직은 더 즐기고 싶다.


제안이 들어온 회사의 업무도 물론 이커머스 계열이기는 하다. 그러나 지금 회사만큼 이커머스 전반의 시야를 갖고 일하기에는 환경이 이미 너무 갖춰져 있다. 이름만 내세워도 잘 팔리는 곳인데 무슨 고민이 필요하겠는가.


배부른 소리 한다고 욕할 수 있다. 단편적으로만 보면 확실히 배부른 소리가 맞다. 그러나 나는 더 앞선 미래를 바라보고 나에게 투자하는 것이다. 그 회사만큼 우리 회사가 커지지는 않겠지만 내 커리어는 그 회사에서 자라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할 것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체력

나도 이제 4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흑..) 제안을 받은 이 회사는 주는 돈만큼 영혼까지 끌어서 갈아 넣어야 버틸 수 있다는 소문이 자자한 회사다. 그다지 어리지 않은 이 체력을 20대처럼 무조건 열정으로 채워 넣기에는 그 회사의 업무 강도에 대한 두려움이 너무 크다.


우리는 회사원이다. 막말로 내 회사도 아니고 큰 회사라면 대표랑 친할리도 만무하다. 그렇기에 불만을 과도하게 감내하면서까지 체력을 소진하기에는 내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다. 아껴둔 체력은 꼭 필요한 때와 적절한 업무에 집중해서 소진하고 싶다.


회사 이름과 연봉만 바라보고 무작정 충성했던 어릴 때와는 다르다. 삶을 보다 윤택하고 효율적으로 살아야 한다. 무조건 힘들다는 소리보다 힘들만한 가치가 있다는 소리를 하며 살고 싶다. 회사가 주는 우쭐함에 굉장한 충성심으로 영혼 갈아 넣어봤자, 그 회사 내꺼 안된다.



그밖에

어색한 면접과 회사에 적응을 다시 해야 하는 귀찮음을 견딜 수가 없다. 정말이지 평생 꼭 한 번쯤은 가고 싶은 회사이고 업무가 너무너무 탐난다면 어떻게든 견뎌보겠지만 단순히 회사명과 연봉이라는 동기는 내게 너무 부족하다. 면접과 적응의 귀찮음이 오히려 내게는 더 큰 리스크다.


넌 귀엽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야


그리고 이 회사를 간다면 휴대폰을 바꿔야 된단다. 최근 애플 A/S 때문에 아이폰을 이제 버릴 때가 되었나 싶었지만, 여전히 나는 진성 호구 앱등이다. 요즘이야 정말 많이 좋아졌겠지만 과거 안드로이드os의 스트레스를 너무 극심하게 앓았던 내게는 매일 안드로보이를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다. 안 간다.






회사, 선택하자

회사원이라면 대기업을 거절했다는 사실보다는 거절한 이유에 집중해주길 바란다. 거절한 이유가 다름 아닌 앞서 말한 지금 재직 중인 회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자신에게 맞는 회사를 찾는 것은 분명 어렵다. 그러나 결코 없는 것도 아니다. 회사의 모든 게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의 신념과 맞아떨어지는 회사를 우리는 찾아내고 선택해야 한다.


아쉽게도 찾지 못하고 결국 무리해서라도 회사를 직접 차려버리는 사람들도 존재하지만, 나처럼 차릴 여건이 안된다면 회사에서 사람답게 인정받으며 살아가면 좋겠다.


지금 내가 때려치운 회사가 누군가와는 합이 잘 맞아떨어질 수도 있고, 반대로 지금 우리 회사가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회사로 기억될 수도 있다. 이처럼 회사는 많고 다양하다. 꼭 죽지 못해 살아가는 회사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다. 회사원으로 살기로 결정했다면 적합한 회사를 찾는 일을 성급하게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꼭 찾아내기를 바라고 진심으로 응원한다.


아마도 나는 IT인으로 뼈를 묻을 것이다. 그리고 내 취향은 월가보다는 실리콘밸리다. 사실은 취향만으로도 거절할 이유는 너무나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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