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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Jun 21. 2021

선택이 필요하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스스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했었다가 맞을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나 스스로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나의 부모가 나를 그렇게 키웠고, 내가 바라보는 롤모델인 친오빠도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었기에 당연하게 높았던 게 아닐까 싶다.


내게 자존감의 기준은 인간관계였다. 인정받기를 원하기보다 서로가 진실된 관계임을 증명하는 것. 누군가와 어울리고 조화롭게 사는 것이 자존감의 원천이었다. 조화로운 삶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가 내게는 나를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학창 시절 와장창 깨졌고 이후 나는 자존감 따위 잊고사는 그저 그런 사람으로 살아왔다.


회사를 다니면서 무너졌던 자존감은 조금씩 회복하는 듯싶었다. 돌이켜보니 자존감이라기보다는 자기 효능감이 생겼던 것 같다. 나 스스로가 가치 있는 인간이라 느꼈다기보다는 내가 어떤 목표를 위해 필요한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비슷한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뭐,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자기 효능감은 높아졌는데 스스로 가치 있는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 것으로 봐서 확실히 다른 의미 같기도 하다.


상사는 내게 일을 잘한다고 했다. 뿌듯했다. 나도 할 줄 아는 게 있구나 라는 안심을 했지만 드러내지는 않았다. 마음속에서는 그 인정을 즐겼지만 겉으로 내비치는 순간 달달함에 취해 실수를 할까 봐, 인정을 잃을까 두려워 최대한 감추고 살려고 노력했다. 조용하고 담담하게 일을 해내려고 노력했고 좋은 결과들이 뒤따랐다. 자존감마저 회복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팀장을 맡게 됐다. 안 해본 일이었기에 두려웠지만 내가 가진 자기 효능감을 믿고 나만의 방식으로 팀을 꾸려나갔다. 정말 공들여 탑을 쌓아갔다. 내가 계속 소진되어도 괜찮았다. 매일매일 하얗게 몸이 타버리는 것쯤 대수롭지 않았다. 상처가 나면 약을 바르면 됐고, 이격이 생겨 삐걱거리면 다시 정비해서 단단해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티끌 같은 부분부터 큰 방향성까지 열심히 설계하고 치열하게 움직였다.


스스로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정말이지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 팀은 모두가 하나가 된 기분으로 매일 즐겁게 부딪히고 부족한 부분은 서로에게 채워갔다. 그렇게 함께 성장해갔다.


그런데 어렵사리 공들였던 탑이 무너질 기미가 보인다. 내가 그나마 스스로 갖고 있던 자아효능감이 떨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온 몸으로 지탱하던 힘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나에 대한 믿음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물론, 여러 이유들이 있었다. 팀장을 맡고 나서 팀원들을 지켜주지 못했던 순간들, 최상위 결정권자의 의견을 잘못 해석하거나 방향을 잘못 설계한 경험들, 실무는 점점 멀어지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갈팡질팡하는 순간 등. 여러 경험이 겹겹이 쌓이면서 내 효능감은 사라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렇게 없어지는 자신의 믿음을 겨우겨우 부여잡고 다시 잘해보자며 하루를 다져왔다. 어두워져 가는 모습에 힘내라고 이야기해주는 동료들이 생겨났다. 분명 무언가 계속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애써 외면했다. 점점 상사와 충돌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그에게 신뢰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신뢰가 점점 고갈되니 충돌하려는 의지도 없어지고 있었고 그렇게, 점점 나를 잃어갔다. 그럼에도 신뢰하는 동료의 말 한마디에 다시 힘을 얻어 일을 해내 왔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면 다시 힘을 얻어 모든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거라 희미하게 믿었다.


그러던 중 지난주, 절대 작동해서는 안됐을 트리거가 발동했다. 나를 완전히 멈추게 하는 말.


'그냥 시키는 대로 해'


기존에 이 말을 접했을 때는 나만 생각했으면 됐기에 떠날 준비를 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다. 팀이라는 존재가 내게 주는 영향이 너무 크다. 팀의 리더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무능하게 느껴졌다. 물론 우리 팀은 내가 반드시 뭔가 해주지 않더라도 알아서 잘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이 있다. 좋은 인재가 많다. 그럼에도 리더면, 스스로 팀에서 없어져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나는, 그 위험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공들여 쌓은 탑은 그렇게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한 회사를 5년 이상 근무하는 것은 둘 중 하나라고 했다. 고였거나, 정말 즐겁거나. 물론 누군가에게는 고인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정말 항상 새롭고 즐겁게 일을 맞이했고, 스스로가 계속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일이 수북이 쌓여 힘든 상황에서도 이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었던 것은 저 트리거가 작동하지 않아서였다. 믿을 수 있는 상사가 있고, 그 믿음 안에서 신나게 충돌했다. 그 과정에서 성장하고 헌신을 해왔다. 좋아하던 작가분이 알려주신 신뢰, 충돌, 헌신(신충헌)은 이 회사에서 고스란히 작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뢰가 무너졌다. 그 이후 충돌은 계속 일어났고 나는 입을 다물기 시작했다. 사실 충격에 가까웠다. 지금까지 내가 써온 글만 봐도 얼마나 이 회사에 대해 애정 있는가가 느껴질 거다. 큰 충격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라는 생각만 머리로 가득하다. 아득하다.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은 회사를 다니면 어쩔 수 없는 결과라는 것을 납득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고 있던 것은 아닐까.


정말 수년 만에 월요일이 참 고되다. 길을 잃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깊게 고민해보는 시간이 당분간 필요할 것 같다. 공들인 탑은 무너지고 있다. 지금 이 시점, 정말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작동한 트리거는 다시 부딪혀볼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에너지는 남아있는가. 이제 누군가의 위로나 의견에 기대면 안 된다. 스스로가 결정해야 할 일이다. 무엇이 문제고 나는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고 싶은가. 객관적으로 바라보자.


선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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