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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하 May 22. 2020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회사원이 됐다.

사실은 할 줄 아는 게 너무 많아서 된 것

결국, 회사원이 된다.


- 회사 다니는 거 지겹지 않냐?
- 지겹지, 근데 딱히 할 줄 아는 게 없어


그렇다. 어떤 원대한 꿈이나 출중한 능력도 없고 딱히 회사원이 아니면 대안도 없어서 회사원이 됐다.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만원 버스에 겨우 몸을 던져 탑승하고 출근하면 일하고 회의하고 밥 먹고 또 일하고 회의하고를 거듭하다 퇴근하고 애보고 자고 다시 일어나는 생활. 이 지겨운 생활을 하려고 초딩 6년 중딩 3년 고딩 3년 대딩 4년까지 총 16년간 배웠다니. 가끔 믿기지 않지만, 결국 회사원이 됐다.


나도 꿈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화가도 되고 싶었고 운동선수도 되고 싶었고 패션 디자이너도 되고 싶었고 애견훈련사도 되고 싶었다. 오히려 꿈이 너무 많았던 탓에 하고 싶은 것도, 배우고 싶은 것도 많았다. 내가 우리 집 돈 좀 축냈지. 끈기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서 하다 관두기를 반복해 욕도 참 많이 먹었다. 차-암 배부르게 살았다. 그렇게 이것저것 건드리다 보니 조금씩 쌓인 지식이나 능력들이 얕고 넓게 포진됐다. 시험운이 좋아서 자격증과 같은 나의 능력을 증명하는 증서들이 늘어갔고 그렇게 조금씩 꿈에 한 발짝 다가가나 싶었는데 맘처럼 안되더라. 누구보다 뛰어난 한 가지 능력을 열심히도 찾았는데 내게는 없는 거더라고. 결국 회사원이 됐다.


창업 붐이 일어날 때 나도 이제 월급 말고 내 돈 좀 벌겠다고 깝죽거린 적이 있다. 당장 돈이 없으면 불안하니까 회사를 다니면서 뭐가 좋을지 열심히 물색했다. 아이템을 선정하고 전혀 새로운 분야라 바닥부터 하나씩 배웠고 어찌어찌하다 보니 정말 돈이 벌어졌다. 첫 달은 200만 원의 매출을 찍었고 그다음 달은 300이 되더니 3개월 뒤 600만 원의 매출을 찍게 됐다. 이게 웬 일? 매출이 이 정도 나니 슬슬 회사를 그만둬도 되겠다는 생각에 뒤도 안 돌아보고 바로 관둬버렸다. 관두기 무섭게 안타깝게도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소비심리가 위축됐고 내가 사업을 꾸린 종목인 소비재들의 매출이 급감했다. 너무나 많이 감소한 매출을 다시 올리는 건 쉽지 않았고 그렇게 1년 만에 성공한 창업가가 되겠다던 원대한 꿈도 증발했다. 다시 결국 회사원이 됐다.




잘하는 게 있어도 회사원을 택한다.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시대가 올 줄이야 ⓒPixabay


친오빠의 경우 어릴 때부터 기계를 정말 잘 다뤘고(특히 컴퓨터를, 286세대) 그림을 기깔나게 잘 그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 시대가 왔고 오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컴퓨터로 그림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아 승승장구해갔다. 물론 회사에서. 그렇게 뾰족하게 잘하는 것이 있는 오빠도 회사를 다녔다. 그 정도면 그림만 그려도 먹고살 수 있었을 텐데 오빠는 회사를 다녔었다. 자신이 잘하는 게 명확한데 회사를 다닌 이유는 하나였다. 편해서. 세금처리나 밥을 해결하기 좋아서였다. 단순하지만 명확한 이유였다. 나처럼 딱히 별다른 대안이 없어서가 아니라 편해서 다녔다고 했다. 물론, 그렇게 십여 년 회사를 다니고 결국 그 뾰족하게 잘하는 것이 공개되면서 성공한 창업가가 됐다. 그건 내 꿈이었는데 훔쳐가다니 나쁜 놈.


잘하는 게 정해져 있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미래가 명확하다. 회사원이란 타이틀을 굳이 안 달아도 먹고살만하다. 근데 오빠는 회사가 편해서 다녔다고 했다. 왜일까? 회사가 편하다는 생각은 회사원인 우리에게 너무 생소한 이야기다. 상사의 눈치 보느라 하루하루가 고되고 말 같지도 않은 요구사항을 처리하다 보면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다. 동료관계에서의 눈치게임도 지치고 어쩌다 운 좋게 승진을 해서 팀장이 되면 위에서 까이고 아래에서 치인다. 회사의 목표대로 가면 팀원의 반발이 심하고 팀원의 욕심대로 가면 회사의 방향과 다르다고 욕먹는다. 내 맘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밝은 미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근데 편하다? 님 장난?


장난, 아니다. 정말 회사는 편하다. 상황이나 환경은 거지 같더라도 누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일해주는 곳은 회사밖에 없다. 우리는 회사를 위해 우리가 뛴다고 생각하지만 회사도 우리를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가장 큰 편안함은 세금처리다. 급여명세서를 보면 욕 나오게 많이 떼 가는 세금이 야속하지만 프리랜서나 사업을 해 본 사람은 이 세금처리가 얼마나 짜증 나는 일인지 알 것이다. 세금신고를 하려고 홈택스를 들어가면 우선 액티브X가 우리를 미치게 만든다. 입력해야 하는 항목이 다 거기서 거기인 거 같고 어떻게 의미를 알아도 이 금액은 어디서 확인해야 하는지 난감하다. 세금신고를 대신해주다니! 게다가 회사는 주말에 쉰다. 회사원이 아닌 사업가들은 대체로 쉼을 보장받지 못한다. 근데 회사는 돈 주면서 쉬라고 며칠을 준다. 쉬라고 할 때 편히 잘 쉬면 된다. 회사 안은 전쟁터지만, 회사 밖은 지옥이다.



능력은 계속 자란다.


회사를 다니면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난다. 모든 종류의 인간이 모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사라는 작은 세계에서 개개인마다 숨겨진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어쩌다 발견되면 그 능력에 감탄하고 업무에 이용한다. 그렇게 서로가 자신과 다른 능력들을 보며 지낸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다. 회사생활 3년 차가 되면 이전에 내게 없던 능력들이 알아서 배양된다. 그래서 3년 차가 되면 이직 성공률도 훌쩍 뛴다. 아는 게 많아지면서 일 좀 해봤다는 자신감도 생기고 가장 열의가 넘치는 때다. 때문에 회사에서도 사람을 뽑을 때 3년 차를 상당히 좋아한다. 연봉을 그리 안 높여도 일은 엄청 열심히 하는 연차니까. 시키지도 않아도 알아서 할 때.


좋은 사수를 만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Pixabay


자연스럽게 배워지는 것도 있지만 회사원에게는 대체로 '선배'라는 존재가 있다. 종종 없는 회사도 있지만, 한 번쯤은 꼭 만나게 되어있다. 소위 말하는 '사수'. 사수는 나를 살피고 돌봐주는 회사의 엄마 같은 존재다. 사수 잘 만나야 많이 큰다는 소리들을 하지만 어떤 사수든 배울 것은 있다. 앞서 글로 썼던 '버릴 것 없는 회사생활'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지랄도 배워두면 쓸모가 있다. 이렇게 선배들에게 배운다. 그것도 돈을 받으면서! 그렇게 나의 능력은 또 레벨 업된다. 원하는 만큼 능력을 얻어갈 수 있는 곳이 회사다.


회사원은 이토록 부단히 배워간다. 배움은 끝이 없다. 끝없이 배워가며 능력을 키운다. 쌓여가는 연차만큼 능력이 쌓인다고 보면 된다. 신입보다는 경력을 회사에서 원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미 많은 능력들이 쌓여있는 상태일 테니까. 굳이 시간 써서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것들 - 가령, 회사생활의 기본적인 태도나 예절과 같은 것들 - 을 이미 어느 정도 갖추고 오기 때문에 경력사원을 찾는 것이다. 회사원이라는 존재는 이처럼 회사 안에서 계속 성장하는 존재다. 멈추지 않고 계속 자란다. 물론 의지에 따라 편차는 좀 있지만.



회사원이라는 자부심


회사를 다니면서 정말로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별 다른 대안이 없어서 회사원이 된 줄 알았다. 근데 돌이켜보니 나의 기본적인 성향도 한몫했고 가진 능력이 회사생활과 잘 맞아떨어져서 회사원이 된 것이었다. 나는 사람과 어울리기를 좋아하고 치열한 걸 좋아한다. 대가족의 일원 속에서 쌓아온 눈칫밥 덕분에 상사 비위도 잘 맞추는 편이다. 사람 심리에 관심이 많아 '좋은 대화법'에 대해 항상 연구한다. 흩어진 자료들을 정리하는 게 재밌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즐겁다. 어느 시점까지는 정말로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회사원이 된 줄로 알았는데, 그냥 회사원이 되려고 내 성향과 능력을 빚어왔나 싶다. 나는 회사원인 게 좋다.


최근 퇴사를 하는 것이 주제가 되어 인기글이 되고 그 안에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많은 회사원들에게 '퇴사'는 꿈처럼 여겨진다. '퇴사학교'라는 회사는 퇴사 후 안정적인 미래를 설계해주기도 한다. 퇴사하면 핑크빛 미래가 있을 것만 같다.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퇴사'라는 행위 자체가 주는 자아실현 같은 것도 있는 것 같다. 난 이런데 묶여있을 사람이 아니라고. 내가 회사를 거부한 거라는 논리가 나온다. 뭐, 틀린 말은 아닌데 퇴사한 사람들 얘기를 잘 보면 몇몇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끝에는 결국 다시 회사원이 된다. 왜냐? 나의 능력을 써먹을 곳은 결국 회사거든.


이쯤 되면 회사원이라는 직업이 내가 '기껏 회사원'이 되려고 이 짓을 했나 싶을 정도의 직업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회사원만큼 능력자도 없다. 하나만 뾰족이 잘하는 사람은 그 하나를 잃으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우리는 다방면으로 잘하는 게 있다.  하나를 잃어도 타격이 크지 않다. 생활패턴이 조금 지겹고 환경이 맘 같지 않더라도 회사원 출신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중간은 한다. 만약 그럼에도 일반 회사원으로 나이 드는 게 두렵다면 지금부터 하나 정해서 특정 능력을 좀 더 깊게 쌓아가면 된다. 나중에 정말 회사를 그만두게 되는 그 날, 지금부터 겹겹이 쌓인 그 능력은 빛을 발할 테니까. 안전하고 편안한 회사의 보호 안에서 원하는 능력을 차곡차곡 쌓아가자.



이 세상 회사원, 모두 파이팅! ⓒPixabay


회사원 그대여. 스스로를 '기껏해야 회사원'이라 여기지 말자. 자부심 좀 가져도 된다. 당신은 할 줄 아는 게 많기 때문에 회사원이 된 것이니. 오늘의 출근길도 파이팅 넘치는 하루가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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