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기획자도 모르는 게 있을 수 있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기획과 관련된 책, 강의가 차암 많다. 라떼는 말이야...(그만)
나 역시 연차 때문인지 웹 기획, 서비스 기획 관련하여 교육 제안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 제법 유명한 인강 회사여서 인지도도 높여볼 겸, 새로운 커리어도 쌓아볼 겸 해볼까 싶어 커리큘럼을 한 번 짜 보려고 하는데, 어우.. 쉽지 않다. 강의하는 분들은 확실히 대단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많은 시니어 기획자들이 그렇게 잘 짜인 기획 강의나 아티클, 타사 기획자 인터뷰 등을 보고는 주눅이 들곤 한다. 나는 저렇게 일하지 않는데, 처음 듣는 용어인데 큰일이네, 난 알지 못하는 게 너무나 많구나. 그 주눅 드는 기분이 무엇인지 안다. 10년이 넘도록 기획업무만 했던 나 역시 그런 교육이나 강의, 글을 보면 자신감이 사라진다. 그동안의 내 경험과 업력이 허송세월을 보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나, 그런 기획 강의나 아티클 하나로 스스로를 낮추거나 기죽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건네주고 싶다. 이것은 훌쩍 시간이 흘러 시니어가 되어버린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주니어들에게는 어떤 교육도 의미가 있다. 수용 가능하다면 최대한 많은 지식을 머리에 넣고 일을 하려는 것은 좋은 자세다. 기획자는 하나의 뿌리 깊은 지식보다도 넓고 얕은 지식들이 서로 연결되어 사고를 더 말랑말랑하게 해 줄 수 있다. 그렇기에 나의 뇌 가용 용량이 허락하는 한도 내 가능한 많은 지식들을 넣어준다면 시니어 기획자로 성장하는데 좋은 자양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기획 교육의 현타는 뜬금없이 시니어들에게 온다. 교육 내용들이 현재 내가 하는 일보다 더 광범위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아직도,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는 것에 적잖게 당황하고 이제 내가 이 바닥에서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뒤쳐지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지기도 한다. 주니어야 배우면서 큰다지만 시니어가 된 이상 배우며 크는 것은 회사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더욱이 두렵고 조바심이 나게 마련이다.
그 마음 이해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모든 회사는 저마다 겪는 경험이 다르다. 우리는 회사원이지 않은가? 현재 한 회사의 시니어로 자리 잡고 있다면 이미 주니어 때 쌓은 많은 지식이 축적되어 있을 것이고 더불어 근무 중인 회사에서의 업력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자신만의 큰 자산일 것이다.
시중의 교육들은 어디서나 써먹을 수 있는 기획의 방법론을 주로 알려준다. 사고하는 방법, 그것을 표현(문서화)하는 방법, 설득하는데 필요한 요건들 등 우리가 해오던 일을 조금 더 상세하고 깊게 알려주는 것뿐이다. 교육이라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하므로 전문적인 내용이라 할지라도 보편적이고 이론화된 것을 알려주는 것이 당연한 목적이다.
어떤 문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시니어들은 감각적으로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의식하지 않고도 행동을 취한다. 교육에서 제시하는 방법론을 적용해서 이렇게 저렇게 해나가야지 계획하는 단계를 건너뛸 정도의 사고력 정도는 이미 갖추고 있다. 교육에서 알려주는 형태로 일하고 있지 않다는 것뿐이지 이미 당신은, 당신의 회사에서 일을 잘하고 있다. 그러니 전혀 기죽지 않아도 된다.
주니어들은 그런 교육을 들으며 기획자나 프로덕트 오너가 매우 어렵고 장벽이 높은 직업이라 생각할 수 있다. 크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교육에서 나오는 모든 방법론을 완벽히 익혀야 시작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보면 뜻이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는 고등학교, 대학교라는 곳을 겪고 회사원이 되었다. 배워온 모든 이론들이 회사에서 얼마나 활용되는가? 교육은 말 그대로 배우는 과정일 뿐이다. 현업에서 완벽히 활용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고 배우고 습득하는 것은 자유지만 좀 모른다고 의기소침할 필요는 없다.
단적인 예로 기획 교육에 늘 나오는 'MECE 방법론'이 있다. 문제 상황에서의 논리적 분석 방식인데, 그걸 현업에서 하나하나 따져가며 논리적으로 일하기에는 우리의 회사가 그렇게 여유롭지 못하다. 물론 배워두면 좋지. 그러나 꼭 그렇게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UX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 보급화와 함께 UX에 기반한 사고를 해야 한다고 하지만, 방법론을 하나하나 적용해가며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안된다.
물론 놀랍게도 앞선 방법론을 적용하며 일하는 연구형 회사도 있긴 하다. 그런 회사를 가야 한다면 교육의 내용들을 모두 익혀가는 게 좋겠다. 회사마다 일하는 방식이나 스타일은 완전하게 다르다. 각 회사의 공식 사이트에 나오는 '인재상'에 일하는 방식이 표현된 회사들이 있는데 괜히 멋있으라고 쓰여있는 게 아니다. 실제로 우리는 그렇게 일하고 있는데, 네 업무 스타일이 잘 맞다면 우리 회사로 와! 를 이야기하는 대목이 일하는 방식이다. 앞선 방법론에 입각한 기획을 하고 싶다면 그런 인재상이 있는 회사에 가면 된다.
그러나 나처럼 일반적인 목적형, 미션형 회사를 다닌다면 학자보다는 전사가 되어야 한다. 기획자라는 이름만 놓고 보면 꽤 근사한 직업 같지만 막상 회사에 소속되면 솔직히 그렇게 멋있기만 한 직업은 아닌듯하다. 회사 속의 기획자는 신기할 정도로 항상 시간은 촉박하고 처리해야 할 일은 넘친고 넘친다. 시니어는 이런 압박 속에서 일을 해낸다. 시니어에게 익혀진 감각은 이론을 넘어서는 통찰이다. 그러니 안심해도 된다. 회사는 이론보다 실전이지 않은가.
타 팀의 기획 리뷰가 있던 어느 날, 15년 정도의 경력을 지닌 다른 동료 기획자가 내게 물었다. 저기 나오는 저 용어들이 대체 다 뭐냐고, 자신이 너무 뒤처져 있는 기분이 든다고. 우리 회사는 프로젝트의 개념이 더 익숙한 매트리스 조직이기 때문에 일명 '크로스펑셔널'을 경험한 스타트업 출신들의 기획자가 기획 리뷰를 하면 세상 뒤쳐진 기분이 들 수 있다. 프로덕트라는 개념부터 너무 생소하고 전부 영어로 구성된 용어들이 엄청 현란하거든.
나 역시 시중의 교육을 보다가 나는 왜 이렇게 아는 게 없는 것 같지?라는 생각을 이따금 가졌던 기억이 있다.(교육자 역시 유명 스타트업에 근무 중이었다.) 그러다 내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다시 들여다보니 사용되는 용어나 해석이 조금씩 달랐을 뿐, 대부분 비슷비슷하게 일을 하고 있다. 그럴듯한 멋진 용어나 이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충분히 많은 일을 해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쪼그라드는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너무나 당연하게 인간의 뇌는 그 수많은 지식을 담아낼 가용 공간이 없다. 그렇기에 항상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고 배우는 것을 계속 써먹으며 '실무 감각'이라는 역량으로 자리 잡게 해야 한다. 시니어인 당신도 모르는 게 당연히 있을 수 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전문가도 모든 지식을 섭렵할 수는 없다. 조금 몰라도 괜찮다. 시니어가 됐다면 내게 주어진 일을 그저 잘 해내면 된다.
그런 쪼그라드는 마음들이 쌓여서일까. 최근 방황의 시기를 가졌었다. 실무를 내려놓은 지 어느덧 3년, 팀장을 맡고 실무 감각은 점점 떨어지고 발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실무로 뛰어들기 위해 이직을 고민했더랬다. 그렇게 진지하게 내 커리어 패스를 검토해봤는데 아직 회사에서 해보지 못한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시니어 기획자다. 실무를 하면 좀 더 많은 일이 '내 것'같은 느낌이 들 수 있겠지만 지금 내게 주어진 매니징 역량을 키우고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환경을 구축해내는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나쁘게 말하면 방황이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왜 기획자가 되고자 했던가, 그리고 나는 그 안에서 무엇을 이루고자 했던가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 같다. 그리고 꼭 기획 실무가 아니어도 내가 기획자로 이루고자 했던 목적을 위해 달리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도 인지할 수 있었다.
시니어 기획자들이 나처럼 쫄아들지 않았으면 한다. 기획자 생활 12년, 어쩌다 팀장이 되긴 했지만 계속 실무를 했더라도 앞선 동료와 비슷한 마음이 들었을 것 같다. 요새 기획 트렌드에 맞는 주니어들과 함께 일을 하다 보면 더욱이 피부로 가까이 와닿아 솔직히 쫄리는 기분이 들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저 시대의 변화구나 받아들이자. 시니어인 당신은 이미, 멋지게 성장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