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바 공익광고에서 얻은 인사이트
나는 출근 시 약 1시간 반 정도를 달리고 난 뒤,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타 다시 30분을 달려야만 회사에 도착할 수 있다. 때문에 대부분은 버스에서 잠을 자거나 음악을 듣거나 넷플릭스와 같은 OTT로 시간을 소비한다. 가끔 글을 쓰기도 하고 책을 보기도 하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는 그저 잠만 잔다.
피곤이 극도로 치닿던 어느 날, 어김없이 버스를 타고 자보려 시도해보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다 버스 앞좌석 근처에 있는 화면에 라바 애니메이션의 공익광고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다. 내가 본 광고는 코로나 백신을 권장하는 아래 광고였다.
내용은 이렇다.
라바는 코로나 이전,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연주하던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그립다. (노란 애 이름이 라바가 맞나..? 암튼 노란 녀석이 주인공) 연주를 하고 싶어 잠시라도 마스크를 벗는 순간 바이러스가 돌아다녀 곧바로 다시 쓰게 된다. 그러다 반대편에서 행복하게 연주하는 친구들 무리를 발견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바이러스를 아주 가볍게 서로에게 패스하면서 물리친다. 하고 있던 연주를 그대로 하면서 말이다. 연주를 하던 일원 중 한 명이 라바에게 달려가 백신을 놓았고 접종 완료 스티커를 받은 라바는 그렇게 원하던 연주를 다시 할 수 있게 됐다는 내용이다.
이 얼마나 명확한 메시지인가!
우리 모두 코로나 백신 접종을 하고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나의 삶을 안전하고 즐겁게 영위하라는 심플하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정부에서 만든 콘텐츠들은 대체로 별로인데, 이 영상을 보면서 느끼는 게 많았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 즉, '목적'이다.
만약, 이 영상에 얀센을 제외한 모든 백신은 2차 접종까지, 그것도 14일 이후가 지나야 접종 완료자가 되기 때문에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넣으면 어떻게 될까. 스토리 사이에 과하게 정책을 끼워 넣느라 오히려 '백신 접종 권장'에 대한 메시지가 명확히 와닿지 않을 수 있다.
이처럼 기획에서는 가끔 과하게 깊이 파고드는 디테일이 전반적인 방향을 흐트러뜨리는 경우가 많다.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간혹 과하게 많이 아는 지식이나 더 알아내려는 성향이 오히려 전달하려는 중요한 메시지를 잃고, 지식과 경험에 기반한 '예외적인 케이스'들을 상상해내면서 설계의 방향이 틀어지는 일들이 발생한다.
때문에 우리는 기획을 할 때 '목적성'에 대해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기획자들은 기획을 하다 보면 예상하지 못하는 변수들과 늘 마주하게 된다. 그런 경험들이 축적되면 나도 모르게 보수적으로 접근할 때가 있다. 이런 사용자 케이스는 어떻게 대처하나요? 유저들이 예측과 반대로 사용하면 되돌리는 기능도 있어야 하지 않나요? 이런 건 설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등등...
기획을 시작할 때부터 너무 나의 사고를 확장하지 말자. 기획은 아무리 완결성을 추구하려 해도 본래 완벽할 수 없다. 나의 기획이 지금 목적을 향해 방향이 올바르게 흘러가는지에만 집중하자.
물론, 그 욕심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안다. 우리는 항상 더 좋은 것을 제공하는 것에 목말라있기 때문에 그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욕심을 부려봐야 직성이 풀린다. 그럼에도 늘 조심해야 한다. 욕심이 과해지면 사용자에게 더 편리하다고, 더 확장된 기능이라고 생각해서 내놓은 기능이 한순간에 쓰레기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시를 하나 들어보자. 늘 시간이 부족한 판매자에게 쇼핑몰 상품을 더 간단하게 등록할 수 있도록 '간편 등록' 기능을 만든다 치자. 쇼핑몰에서 필요로 하는 필수항목은 무엇일까. 일단 무슨 상품인지 알아야 할 테니 상품명, 얼마에 팔 건지 알려줘야 하니 가격, 종류가 다양할 수 있으니 옵션 정도. 그리고 가상의 공간에서 이 상품이 뭔지 알려야 하니 이미지 정도 되겠다.
그렇게 항목을 정하고 폼을 구성해보면 뭔가 너무 휑한 기분이 든다. 어떤 브랜드인지 알려줘야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어떤 판매자는 성인용품을 판매할 수 있으니 미성년자 구매 가능 여부도 알려줘야 될 것만 같다. 이런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두고 상품 폼에 '왠지 그럴 것 같은' 항목을 때려 넣는다. 그렇게 나온 결과물은 그냥 조금 항목이 약간 줄어든 일반적인 상품등록에 불과해진다. 결국 그냥 버전이 두 개가 돼버린다. (우리 회사 얘긴가..)
간편 등록의 목적은 '빠르고 간단하게' 등록하는 거다. 쇼핑몰에 당장 올려서 구매자들이 상품에 대한 일부 정보를 보고 구매만 할 수 있으면 된다. 그렇다면 앞선 4개의 항목으로도 가상공간의 판매를 위한 준비로 충분하다. 당근마켓의 상품 폼을 생각해보면 쉽다. 상품명, 카테고리, 내용, 이미지, 가격. 그게 전부다. 그 정도의 정보 만으로도 가상공간 거래는 충분히 일어난다. (물론, 아주 단편적인 예시다.)
욕심은 조금 나중에 내도 괜찮다. 우선 목적에 맞게 사용자를 위해 기획하고 내 욕심은 조금 나중에 차근차근 담아보자.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준비하지 말자. 우리는 충분히 목적성을 추구하며 기획할만한 사용자의 데이터가 있다. 네가 지금 이게 필요하니 이걸 준비했어가 돼야 한다. 회사의 상사가 필요로 하는(=강요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용자가 왜 필요한지, 그 목적에만 집중하자.
과한 디테일의 또 다른 위험은 내 과거 경험이 매우 밀접하게 닿아있을 때다. 너무나 꼭 맞는 경험을 했던 내 과거가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전락하는 순간 기획은 라떼를 위한 설계가 되어버린다. 단적인 예로 물류서비스 기획자가 택배 알바 경험이 있다고 해서 자신이 했던 배달 경험을 그대로 서비스에 녹여버리는 것과 같은 행동을 말한다. 경험의 디테일이 있다 보니 그 세밀한 프로세스가 정답처럼 느껴져 버리는 오류다.
위 예시로 봤을 때 모든 택배 기사님들이 그 한 사람의 알바 경험과 같은 행동 패턴으로 배달을 하지는 않으리라. 나는 택배를 직접 뛰어보지 않아 잘 모르지만 배달을 할 때 각자 자신만의 방식으로 배달을 할 것이고, 절대 한 사람의 경험 예시가 모두를 대변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늘 조심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이 개인의 경험 디테일이다.
물론 가끔은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아예 이 방면에서 아는 사람도 없고 너무나 생소한 상황이라면 누군가의 경험을 토대로 그대로 녹여 상용화한 뒤 개선해나가며 나아지는 좋은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충분히 많은 케이스가 있는 상황이라면 한 사람이 제 아무리 디테일한 경험을 했다고 한들, 그것은 절대 정답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된다.
짧은 영상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라바 광고를 보고 너무 메시지가 명확해서 이야기가 흘러 흘러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기획은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목적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내가 당장 뭔가 기획을 해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면 적어보자. 이걸 기획하는 목적이 대체 뭔지. 누가 이걸 왜 필요로 하는지, 그리고 이걸 쓰는 그 사람에게 어떤 효율과 편의를 줄 수 있을지. 써 내려가다가 너무 깊어진다 싶을 때는 다시 꼭 돌아와야 한다. 지금 하려는 그 기획의 목적은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