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래? 내가 괜찮다고
자신도 모르게 상처가 되는 말을 내뱉을 때가 있다. 나도 그럴 때가 있겠지만 내 주변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상처를 주곤 한다. 내 성향이 양향성이다보니 상대적으로 그런 말을 들어도 감정이 크게 동요되거나 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힘들지 않다거나 어렵지 않은 것이 아닌데 간혹 너무나 쉽게 내 상태를 단정 짓고 말을 던지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 받아들이는 당사자에게는 상당히 무겁지만 너무나 가볍게 던지는 말들 몇 가지를 소개해본다.
대학교 때부터였던 것 같다. 과제를 하거나 공모전, 대학생 외부활동 등을 하면 항상 내가 프레젠테이션을 맡게 되는 결과가 있었다. 나에게 그 무거운 과제를 맡기면서 건네는 가벼운 한마디.
네가 해, 괜찮지? 넌 원래 이런 거 잘하잖아
프레젠테이션이나 강연 등 낯선 대중 앞에 서는 일이 익숙하고 쉬운 사람이 몇이나 될까? 누군가는 "네가 정말 잘해서 그래"라는 좋은 말도 건네주었지만 대체로 내가 프레젠테이션을 담당했던 이유는 그 일을 하기 싫은 사람만 있어서, 때문에 누군가는 해야만 했기에 했을 뿐이다. 대중 앞에 서는 것이 쉬워서도 언변이 뛰어나서도 아니다. 나도 그게 쉬웠으면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했겠지.
프레젠테이션 하나의 준비를 위해서는 엄청난 마음의 준비와 연습이 필요하다. 그 준비는 심적으로 상당히 고된 일이고 물리적인 시간도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힘이 든다. 청중이 익숙하면 그래도 상대적으로 괜찮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이 반 이상 되면 제아무리 자주 했던 사람도 부담과 경직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 짧지만 완벽한 15분을 위해서 못해도 이틀은 꼬박 그것만 붙잡고 살아간다. 미친 사람처럼 혼자 중얼중얼거리게 된다.
그러니 내게 당연하다는 듯 '넌 원래 잘하잖아. 그런 건 네가 해야지'라고 너무 당연하고 쉽게 던지는 않았으면 한다. 원래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아니 막말로 원래부터 잘했으면 내가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게? 수십 번의 연습과 극도의 긴장을 투여한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특정인이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에 대해 돌이켜본다. 바로 우리 엄마. 30여 년 들었으면 내성이 생길 법도 한데 듣자마자 피가 머리끝까지 뜨겁게 솟구치는 말.
그냥 네가 해
내 의중에 관계없이 엄마가 명하는 일을 따라야 할 때가 있다. 특히 무언가 양보를 해야 하는 일이 생길 때 참 많이 듣게 된다. 나는 어릴 때부터 오빠를 위해 희생하는 일들이 많았다. 오빠의 원활한 고3 생활을 위해 오빠의 고등학교 근처로 이사를 가기도 했었고 컴퓨터를 좀 쓰고 있다가도 오빠가 오면 무조건 양보를 해야 했다. 명절이 되면 오빠뿐만 아니라 다른 친척들이 있어도 꼭 잡일을 나한테만 시킨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내게 말했었다. "그냥 네가 해. 괜찮지?"
가족여행을 갈 때도 그렇다. 가족끼리 사이가 아무리 좋은 집안도 여행을 가면 다투게 마련. 그렇기 때문에 여행의 계획을 짜는 것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요한다. 부모님 하고만 가는 거면 모를까 오빠네가 여행 멤버에 포함되더라도 여행의 모든 계획 수립과 사전 조사는 내가 해야 한다. 오빠한테 조금의 도움의 손길이라도 요청하는 날에는 엄마가 슬며시 다가와 말을 건넨다. "오빠 바빠. 네가 그냥 해. 넌 괜찮잖아" 엄마, 나도 바빠..
가끔 왜 나한테만 그렇게 시키냐고 하면 엄마는 내게 말한다. "넌 어디 내놔도 먹고살 것 같아." (내포하는 말: 그러니까 넌 좀 힘들어도 괜찮잖아?) 처음에는 엄마가 나를 믿는구나 생각하다가도 다시 곱씹어보면 기분 참 묘하다. 오빠는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고 나는 잡초처럼 자랐으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힘들어도 괜찮은 게 아니라 그렇게 자라왔다고! 엄마아!!
업무량이 많아지는 경우 상사에게 고충을 털게 될 때가 있다. 지금은 그래도 나의 고충을 들어주고 해결책을 제안하는 상사와 일하고 있지만 과거에는 아예 귓등으로도 안 듣는 사람도 많았다. 개중에는 내가 힘들다고 하면 "너 아니어도 할 사람 많아." (내포하는 말: 그러니 닥치고 그냥 해)라고 건네는 상사가 있었다. 그 일이 아무리 중요하거나 멋진 일이라 할지라도 힘든 건 힘든 건데 사람 참 야속하다.
힘들면 때려치워, 너 아니어도 돼 라는 듯한 말을 던졌던 그 상사는 회식자리나 동료들과의 가벼운 커피타임에서도 내게 가볍게 내뱉는 말들이 많았다. 가령 '쟤는 시키는 것만 참 잘해' 라던지 '일만 잘하면 뭐해 성격이 더러운데' 따위의 말들. 그런 말을 듣는 나에게 주변의 누군가가 "아휴, 상처 받겠다~" 하면 상사는 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이런 말을 한다.
에이, 얘 그런 걸로 상처 안 받아. 그치?
모든 사람들 앞에서 '상처 받는데? 이 자식아?'라고 할 수도 없고. 하하 그렇죠 뭐~ 하고 사람 좋게 넘겨버리곤 했다. 회사가 군대도 아니고 대통령 직속 하급자도 아닌데 왜 그렇게 군기가 바짝 들었었을까 후회도 된다. 그 상사를 알게 되고 회사에서 만큼은 나의 친절함을 처음부터 무조건적으로 드러내지 않게 됐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니까. 저 말 끝에 그치? 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주먹이든 날라차기든 했어야 했다.
결혼을 이미 해서 다행이지 내게 연애만큼 어려웠던 인간 사이의 관계는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연애를 하기 전 썸을 타는 것은 제법 할만했는데 연애만 시작했다 하면 그렇게 호구가 됐다. 연애호구 이야기는 다음에 해보는 것으로 하고, 연애 당시 단골처럼 들었던 멘트를 하나 소개한다.
넌 나 아니어도 되잖아
내가 일에 집중을 했거나 야근이 잦아지거나 친구들과의 관계에 더 즐거워하는 모습이 보이면 상대에게 심심찮게 들었던 말 중에 하나다. 대체 그 사람은 나에게 이런 말은 왜 했을까? 곱씹어 생각해보면 해석은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나름대로 해석]
너와 나는 특별한 관계인만큼 너의 대부분의 시간을 나와 함께 할애해야 하고 나와 있을 때는 항상 즐겁고 웃으며 행복해야 해. 하지만 내가 볼 때 너는 지금 나와 함께 있을 때 그렇지 않아 보여. 너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구여도 괜찮을 거야.
솔직히 말해서 '너 아니어도 된다'는 말은 일부 공감한다. 연인이 아닌 다른 관계도 내게는 충분히 중요한 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만약, 연인관계 속에서 저 말이 '너는 내가 아니어도 쉽게 다른 사람 만나면 되잖아'의 의미라면 아주아주 잘못됐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 말고 딴 사람을 사랑해도 크게 문제없지 않냐는 질문인데. 너무 잔인한 말이 아니던가.
혹자는 스스로가 상대보다 부족해서 자신보다 더 알맞은 사람을 만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약간 냉정하게 얘기했을 수도 있지 않냐고 반박할 수 있다. 미안한데, 웃기는 소리. 서로 사랑하면 된 거지 부족하고 충분한 게 어디 있나. 그 충분치의 기준 누가 정하는 것인가. 상대가 마음에서 떠났으면 몰라도 사랑하는 상대에게 가벼이 던질 말은 절대 아니다.
"넌 괜찮지?"라고 단정 지어 말하기 전에 상대편의 마음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고 내뱉었으면 좋겠다. 관계적 편안함으로 인해 상대를 생각하지 않고 쉽게 말을 내뱉지는 않았는지, 상대의 지금 감정선에 꺼내도 괜찮은 말인지. 상대에게 아주 어렵고 힘든 것을 너무 쉽고 가볍게 취급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꼭 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내뱉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그럼에도 상대의 의중을 확인해야 한다면 "혹시 괜찮겠어?"라고 정중하게 물어보는 편이 좋겠다. 나에게 "넌 그래도 괜찮잖아?"따위의 말을 건넬 계획을 갖고 있다면 행하기 전에 그 입부터 조심하기를 바란다. 확 주둥이를 꼬매버릴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