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단계 - 초월적 육아
이제 마지막 초월적 육아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인지적 육아와 자아실현적 육아는 이에 대한 구체적 이해와 실천이 어려울 뿐 옳다고 여기리라 생각한다.
초월적 육아는 아무리 이해한다고 해도 이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지 모른다.
초월적 육아를 한다는 것은 이미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초월해야 하기에..
죽음에 대한 이해
초월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죽음에 대한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당신이 가장 먼저 초월해야 할 것은 당신의 목숨이고, 이후에 그 목숨이 가진 모든 것을 초월해야 하니까..
하루를 산다는 것은 하루를 죽는 것이다.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어떻게 죽느냐는 것과 같다.
먹기 위해 산다는 것은 먹고살기 위해 목숨 걸고 있다는 것이고, 가족을 위해 산다는 것은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가족을 위해 산다면서 위급한 순간에 자신의 목숨이 먼저 생각난다면 그는 가족을 위해 죽는 사람이 아니므로 가족을 위해 산다고 할 수 없다.
삶의 가치란 어떠한 목숨 값을 하느냐는 말이고 그것을 위해 내 목숨을 걸겠냐는 말이다.
죽음에 대한 결정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다가 죽겠다.'
평범한 사람의 가장 흔한 죽음에 대한 결정이려나..
이 말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기 위해 목숨을 걸겠다는 다짐이 들어가야 한다.
자신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결정이 없다면 아직 삶에 대한 확실한 결정도 없다고 단언한다.
모호하게 설정한 행복만큼 모호하게 목숨 걸고 모호하게 가지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무엇을 선택하고 버리라는 뜻은 아니다.
허나 모든 생명은 태어난 순간 죽음을 확정받는다.
정해진 시간 속에 당신의 생명이 의미를 찾는 곳은 삶의 마지막 날까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죽음에 대한 합의
난 내 아이가 크면 서로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 너의 목숨으로 인해 내가 진정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굽히지는 않으리라.
그러니 너 또한 너의 정의에 내 목숨을 염두에 두지 말아라.
서로의 목숨을 구걸해 불의가 되지는 말자.
진정 옳은 것이라면 자신의 목숨이 발목 잡아선 안되고 주변의 소중한 것도 그 길을 방해해선 안된다."
목숨이 가치를 갖는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의미가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만으로 너의 목숨이 가치를 갖지는 않는다.
그 목숨이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지, 무엇을 위해 죽을 수 있는지를 항상 생각해라.
죽음에 대한 초월
"옳은 잃은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네가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의연히 목숨을 버리거라. 너의 목숨은 너 한 사람의 것이 아니다.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이 글은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쓴 편지이다.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 불가능에 가깝다.
이 나라의 정의가 패배함으로 모든 초월자들은 죽었고, 평민은 생존하고 있으며, 권력자들은 만족하고 있다.
목숨의 가치
안중근 의사는 자신 목숨을 버려 국가와 국민을 구했다.
그의 목숨은 수십만, 수백만의 가치를 갖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억압과 생존의 세월을 지나면서 목숨의 가치가 자기 목숨 하나의 값어치도 하기 힘들어졌다.
'남을 밟고 일어나서라도 살아남아라.'
살기 위해 발버둥 치다 못해 이제는 자신의 아이도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이제 목숨의 가치는 자기 목숨인 1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목숨을 해치는 -의 목숨의 가치를 갖는다.
당신의 목숨은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당신의 아이는 얼마만큼의 가치를 가진 사람이 되길 바라는가?
살아있음이 죄악이 된다는 것은 세월호 사건이나 옥시 살균제 문제나 너무 많아 나열하기 힘들겠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내 아이를 너의 목숨을 버려 사람들을 구하는 선장으로 키우고 있는가?
혹시 남들은 다 죽어도 너는 살아남으라는 세월호의 선장으로 키우고 있지는 않는가?
기차 딜레마
당신은 지금 기차의 운전사이다.
저기 보이는 선로에는 당신의 사랑하는 아이가 서 있다. 이 기차를 멈추기에는 늦었고 살리기 위해서는 오직 기차를 틀어 이탈시키는 방법밖에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기차 안의 100명의 모든 승객이 사망한다. 당신은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나의 아이를 살리기 위해 100명을 죽인다면 우리는 100배의 희생을 감수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아니 희생은 이런데 쓰는 말이 아니다. 100명의 나와 상관없는 다른 목숨을 죽여 내 소중한 한 목숨을 살리는 것이다.
내가 죽는 것은 감수할 수 있으나 내 아이는 100명을 죽여서라도 지키고 싶은가?
그 아이가 크면 세월호의 선장이 된다.
이런 사람이 100명 중 한 명만 존재해도 확률적으로 인류는 전멸이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이 기차의 선로에 보이는 당신의 아이를, 부모를, 자기 자신을 죽여 모두를 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모두가 살 수 있을 것이다.
정의가 죽은 세상에 미래는 없다.
적어도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좀 더 정의롭길 기대한다.
내가 죽는 날까지 내 목숨은, 내 죽음은 정의를 향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