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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딱한 나선생 Jun 24. 2016

18. 이기심의 확장

황지우 시인이 이렇게 말했다.

'이타심도 이기심이다'


내 해석이 그와 같을지는 모를 일이다.

난 이타심을 '이기심의 확장'이라 말하겠다.




내가 나를 위하는 모든 욕구들은 나에게 이기적이다.


생존을 위해 내 배를 채우고, 경제적 안정을 위해 좋은 직장을 구하는 일.

연인과 친구, 다른 관계에서 내 만족을 위해 하는 모든 일.

실존에 있는 당신이 진리를 탐구하든, 자아를 실현하든 어차피 당신의 것이다.


자신이 어떤 욕구수준에 있던 중요치 않다.

내가 가진 모든 욕구들은 이기적이다.

그것이 나를 향한다면 말이다.


이기심의 가장 작은 범위, 나.



가족


가족은 내가 태어나면서 무조건 속하게 되는 1차적 사회이다.

하지만 난 가족의 의미를 태어난 가족이 아닌 만든 가족에 더 중점을 두고 싶다.


너를 내 것으로 하기 위한 연애로부터 함께 살아가기를 약속하는 부부까지.

내 이기심이 최초로 타인에게로 넘어가는 단계이다.


내 가족을 위해 돈을 벌고 시간을 쓴다. 

나의 이기심이 다른이에게 가치가 되는 소중한 공간이다.


하지만 내 가족을 위해 사는 것을 우리나라 사회에선 이기적인 범주로 보는 듯 하다.

물론 일을 우선시 하는 정부와 기업 위주의 생각과 현실이 뿌리 깊게 박힌 탓이겠지만..


이기심이라 치부되는 이타심의 가장 작은 범위, 가족.



사회


나의 이기심은 나, 가족을 넘어 사회로 넘어간다.

내가 속한 친구관계, 직장, 공동체 등의 사회.

나와 같은 이기심을 공유하는 모든 관계들.


나와 마음 맞는 친구,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

내가 돈을 벌고자 하는 직장, 취미를 공유하는 모임, 뜻을 함께 하고자 하는 그 어떠한 단체들.


사회에 속해서도 나만을 생각하는 그런 이기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친구를 위하고, 직장을 위하고, 내가 속한 그 어떤 사회를 위해 마음을 쓴다고 해도 이기적이다. 그 사회에 내가 속했기 때문이므로..


이기심을 공유하여 이타심이 되는 관계, 사회



국가


국가를 위한 이기심이라..

이제는 어느 정도 이타심이라 부를만 하지 않는가 싶다.


국가에 소속된 한 인간이 무언가를 기여한다는 이타심이라면 위에서 말한 사회의 큰 범위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적 이기심은 국가 전체를 나의 마음에 담는 것이다.


내가 속한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기심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이익을 생각한다.

내가 선택한 여, 야의 문제가 아니라 옳은 정책을 고를 수 있는 수준에 이른다.

즉, 이 단계에서는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의 이기심을 넘어 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국가의 이익 안에 갇혀 있는지 모를 일이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은 그 나라의 위인전에 나온다.

허나 그 나라의 위인이 때론 다른 나라의 악인이기도 하다.


나와 너를 보고 우리를 추구할 수 있는 이타심, 국가



사람


이 단계에서는 사람을 묶는 어떠한 경계도 넘어선다.

내가 소속된 그룹의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속한 국가를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람의 가치를 본다.


인권운동을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구호활동을 하는 사람의 본질이 여기 있다.

저 멀리 못 사는 가난한 나라의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이 나에게 아픔이 되는 것은 그나의 마음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의 평등과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권, 존엄성을 주장 하는 것도 이 '사람'의 범주에서 이야기 되는 것이다.


우리를 넘어 모두를 볼 수 있는 단계, 사람.



자연


이제는 완전한 물아일체의 단계이다.

자연과 우주를 나의 것으로 여기며 나를 자연의, 우주의 일부로 생각하는 것.


자연과, 세상과의 조화를 말하며 이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의 본질이다.


철학자 강신주의 말을 빌리자면 모든 생명과 물질이 '너'가 되는 것이다.

동물을 보호하자는 사람에겐 동물이 '너'로 보이는 것이다. 

숲을 지키자는 사람에겐 숲, 나무들이 '너'로 보이는 것이다.

특정 종을 보호하자는 개인의 감정이 투사된 것이 아닌 모든 생명의 균형을 말하고자 한다.


이제 여기선 이기심이 이기심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우주의 아주 작은 일이라는 것을 안다.

자연을 아는 사람은 '자연스러움'을 추구한다.


나를 넘어 세상에 존재하는 내 이기심, 자연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나의 이기심이 어느 만큼을 감싸는가.

내 것이라고 느끼는 부분이 어디까지인가.

어떠한 이타심도 내 이기심에 들어온 그 무언가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나를 닦은 자만이 가정을 가지런히 하고, 나라를 다스려 세상을 평화롭게 한다.

이 이기심의 범위는 나를 기본으로 하여 올라간다. 아래를 무시하고 올라갈 수 없다. 매슬로우의 욕구이론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아래를 충족해야 올라갈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자신을 채우지 못한 이기심은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자신만을 추구하게 된다.

자기 가족의 배고픔을 버리고 다른이의 배를 채우는 빈껍데기의 이타심을 갖진 않길 바란다.

사회, 국가와 같은 집단의 이기심에 갇혀 사람, 생명을 놓치는 일이 없길 바란다.


가족적 이타심을 가진 사람은 자신은 굶어도 가족을 위해 음식을 나눌 수 있다.

국가적 이타심을 가진 사람은 가정, 사회에서도 양면을 보고 옳음을 선택할 수 있다.

자연적 이타심을 가진 사람은 그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조화를 이루어 살 수 있다.


이기심은 그 영역의 이기심을 추구함만으로 나쁘지 않다.

이기심은 이기심 자체로는 옳은 것이다.

왜 이기심이 나빠지는지 다음 글에서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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