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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딱한 나선생 Jan 23. 2017

짜증 나는 빠른 년생

두 남녀가 있었다.

서로 편하게 대하는 듯 하지만 자주 투닥거렸다.

마치 친구인 듯 친구 아닌 애증의 관계랄까.


그 둘이 썸을 타는 거냐고?

아니다.
그저 빠른 년생과 아닌 사람일 뿐.


누군가를 위로 존중할 수도 친구로 여길 수도 없었다.

40대가 넘어가는 그들이었지만 이 문제는 쉽지 않았다.

예전 TV프로에서 빠른 년생을 가지고 투닥거리던 할머니들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나이 문제는 나이를 먹어도 해결하기 어려운가 보다.



위, 아래


"선생님, 쟤 원래 우리보다 동생이에요."


재작년 언젠가 학생에게 들었던 말이다.

아이들은 나이를 엄청 의식하고 있었고 생일로도 누가 위고 아래 고를 나누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는 운동장을 사용할 권리가 되기도 하고, 보드게임의 순서를 정하기도 했다.

윗사람으로서의 역할이 짜증 날 수는 있어도 힘이 더 있는 것은 위이다.


대학에선 한 학번 선배가 제일 무섭다고 한다.

'한 학번'이라는 작은 차이도 크게 만들기 위해 더 엄하게 한다.

3, 4학년은 가만히 있어도 존재가 높아진다.

한 학번이 두려워지는 만큼 하늘 같은 선배가 되는 것이다.


'꼬우면 먼저 태어나던가'

시간이 계급이 되는 사회에서는 역전이 불가능하다.

나이는 아무리 먹어도 앞지를 수 없으니.


그런데 아주 짜증 나는 놈이 있다.

같은 숫자를 가졌는데도 '위'에 있는 놈들.

바로 '빠른 년생'이다.



커트라인


정말 그지 같아도 병장에게 뭐라 하긴 어렵다. 

허나 한 두 달도 차이 안 나는 선임한텐 말할 수 있다.

아니, 똑같은 행동도 더 아니꼽다.

'네가 나랑 얼마나 차이 난다고 이러냐.'


빠른 년생을 바라보는 보통 년생들의 눈이 이렇지 않나 싶다.

확실한 차이가 아닌 커트라인에 걸린 관계.

같은 점수를 받아놓고 불합리한 추가 점수를 받아 들어간 놈.


하지만 우리나라에 빠른 년생이란 게 없었다면 억울함은 없었을까.

12월 31일 생 형을 모시는 1월 1일 생은 억울하지 않았을까.

우리에겐 더 객관적으로 형, 동생을 나눠줄 기준이 필요한 것인가.


왜 우리는 나이에 민감한가.

나이가 갖는 무언가의 힘이 있다면 이 문제는 계속되리라.



문화를 넘어서


난 나이에 관해서는 서양식 문화를 동경했다.

누구든, 나이 차이가 얼마든 서로 대등하게 반말을 하는 것 말이다.

나이가 뭐라고 그 얼마를 따져서 위아래를 나눌 바에야 없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물론 우리의 문화에도 좋은 모습이 있다.

형 대접을 받기보다는 형 노릇을 하려는 사람.

아랫사람을 챙기고 도와주고 이끌어주는 사람 말이다.


또, 나이가 많아도 정말 편하게 대해주는 사람도 있다.

위에 서려는 사람이 아니라 내 옆으로 내려와 주는 사람.

수직적인 우리 문화에서 이런 사람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다시 문화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이를, 수직적 문화를 없애면 좋은 관계가 될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반말을 하는 문화에 있었다면 그 속에서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문화가 만든 친구가 아니라 문화를 넘어서는 진짜 친구를 찾아야 한다.


빠른 년생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다음 글은 빠른 년생의 변명을 써보려 한다.

난 누군가의 위가 되기 위해 빠른 년생으로 태어난 건 아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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