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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딱한 나선생 Apr 16. 2017

현대판 호부호형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너무나 유명한 옛날의 이야기인데..
왜 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들릴까.



나이


지금의 우리에게 형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10살인가, 형에 님을 붙이면 20살도 가능한가?

형에 형에 형을 더하다 보면 아버지도 형이 가능하다던가.


나이를 기준으로 형과 동생이 나뉘는 건 확실한데, 그 기준은 분명치 않다.

난 열몇 살 위로도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반대로 열 살도 차이가 안 나지만 부르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또, 같은 나이라고 해도 차이가 난다.

20살도 넘게 차이나는 행정실 주무관님은 '형님'이 가능하다.

그분들도 그리 원했고, 그만큼 가까워졌다.


하지만 교장선생님은 불가능에 가깝다.

내가 '형님'이란 말을 붙이려면 다들 미친놈 취급을 한다.

그분들도 나를 동생이 아닌 교사로만 보았다.



한계


얼마 전 친한 동생과 술자리를 했다.

동생도 직급이 올라가고 부하직원이 생겼다.

자기도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같이 술도 먹고 했단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편해지면서 회사에서 "OO야~" 이렇게 된단다.

다른 직원들도 있는데 함부로 막 말하는 건 조심해야겠다고.


물론 나도 공개석상에서 그러는 건 위험하다고 했다.

하지만 좋은 마음을 거두지는 말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관계가 발전해 가는 것인데, 직장이라는 한계로 관계를 가두지 말라고.


난 다시 물었다.

다만 그 부하직원도 너에게 편하게 하고 있냐고.

잠시 생각 끝에 그건 아닌 것 같단다.


그래. 맞다.

직급이든 나이든, 위에서 아래로 하는 건 편할 수 있다.

하지만 아래에서 위로 하는 건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것'과 같이 힘들다.

하지만 난 끝까지 거슬러 올라 만날 것이다.



관계


인간이 인간 이하의 개념에 귀속될 때 인간은 인간 본연을 잃어간다.

'사람을 사람으로 본다는 것' 글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내가 형, 누나를 지향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교사라는 2차적 규범보다는 형, 누나의 1차적 규범이 인간 본질에 가깝다.

일로서의 내가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나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계급사회는 불합리했던가.

지금의 직급사회는 어떠한가.

인간관계로서의 제약은 똑같지 않은가.


홍길동은 왜 괴로워했을까.

아버지를, 형을 사랑해서였을까.

자신이 처한 신분의 제약 때문이었을까.


나는 단지 호부호형을 원해서 이러는 건 아니다.

어차피 지금도 형이라 부를 수 있다 해서 '나의 형'이 되는 건 아니니까.

형이라고 부를 수 있어서 관계가 연결되는 것이 아니듯,

형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관계를 포기하지는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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