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싫어는 좋아 나빠는 싫어

by 삐딱한 나선생

이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이 산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다 다르다.

그럼에도 같이 살아가려면, 최소한의 규칙이 필요하다.



좋아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곁에 두려 한다.

그 좋음의 기준은 취미일 수도, 생각일 수도, 성별일 수도 있다.

그 어떤 조건이 되었든, 좋은 걸 좋다고 말하는 게 죄악일 순 없다.


다만, 좋아하는 사람들만 함께 하다 보면 위험해진다.

같은 생각을 가진 그룹은 갈수록 보수화 된다.

정치가 무서운 건 그 때문이다.


볼링 동호회에 가면 볼링이 최고라 하고, 배드민턴에 가면 배드민턴이 최고란다.

모든 운동이 나름의 재미를 담고 있지만, 그 운동만 옳다 하면 그르다.

일상의 삶에도 고인물이 썩어가듯, 정치화되는 모습은 없는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싫은 사람을 욕하는 말이 다라면.

교회에 나가 신께 기도 올리며 다른 신을 욕하고 있다면.

혹시 내 좋음은 타인에 대한 싫음을 전제하진 않는가?



싫어


연휴엔 부모님 댁에 가서 아빠와 한 잔씩 했었다.

그러다 '진짜 다신 내가 아빠랑 술 먹나 보자'라고 했던 적이 있다.

같이 술을 먹고 있으면서, 나보고 술 많이 먹는다고 잔소리를 지나치게 해서.


난 술이 싫다는 말은 괜찮다.

그냥 같이 안 먹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술 먹는 인간은 나쁘다 말한다면 싫다.


고기가 싫다는 사람과는 밥을 먹을 수 있다.

하나, 채식주의자를 앞에 두고 고기 먹긴 어렵다.

나를 동물을 죽이는 나쁜 놈으로 보고 있을 게 아닌가.


승진이 싫을 수도, 술이 싫을 수도, 그 어떤 것도 싫을 수 있다.

다만, 당신의 싫음을 나의 나쁨으로 가져오진 말아다오.

싫다는 말은 괜찮지만, 나쁘단 말은 아프다.



나빠


나도 물론 내 나름의 옳고 그름은 있다.

인간 이하의 비도덕적인 내용은 말할 가치도 없다.

그러나 내 짧은 생의 배움으론 가치에 대한 논쟁은 의미가 없었다.


어릴 적엔 교회 다니는 친구와 깊게도 싸워봤다.

왜 신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지 못하냐, 왜 홀로 서지 못해 신에 기대냐.

결국 감정만 소모될 뿐,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소중한 친구만 잃을 뻔했다.


그의 삶은 나의 삶과 달랐다.

그의 아빠는 목사였고, 집은 교회였다.

삶의 기반을 성경에 둔 사람과 과학으로 논쟁하면 안 되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선 나를 교화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신을 믿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는 꽤나 오래 친구일 수 있었다.


TV에선 교황과 스님이 만나기도 한다.

그들이 단지 일시적 만남이 아닌 함께 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책 [사피엔스]에서는 인간이 '상상의 질서'를 통해 인류를 통합할 수 있었다는데.


어쩌면 우리는 공통분모를 찾지 못해도 함께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내 가치의 소중함을 지키되, 다른 사람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는 것.

싫다고는 말해도 나쁘다고만 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저는 게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