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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삐딱한 나선생 May 07. 2019

필요와 껍데기

땅콩을 깠다.

코딱지만 한 알이 나왔다.

나도 그 쫄아붙은 땅콩이 되진 않을는지.



껍데기의 빈틈


교감, 교장이 되고 직급이 올라가면 대형차를 뽑더라.

이젠 그랜져도 흔해져서, 관리자는 제네시스 이상급을 뽑는다.

물론 예외적인 소수도 있겠으나, 이건 경향성이다.


사실 어떤 교장한텐 대형차가 필요 없었다.

크기만 커서 벽에 부딪히고, 남의 차를 긁고.

밟는 것도 두려워 고속도로도 100을 겨우 유지한다.


사실 내 운전 실력에 맞는 적당한 차는 경차였다.

그러나 남들이 하는 말, 사회적 시선 때문에 큰 차를 골랐다.

내 알맹이는 작은데, 껍데기를 키웠다.


비단 이런 일 뿐이겠는가?

자연은 내면을 채워 껍질을 만들어도.

인간은 껍데기를 먼저 보고, 속을 판단하니.



필요의 적정선


인터넷에 들어가서 차에 관한 댓글을 보면 가관이다.

현대 기아차는 쓰레기고, 독일차도 탈 게 못되며, 억은 넘어가야 차다.

차의 성능, 외관 등 대상의 절대적 가치만을 놓고 논하자면 아랫것들은 다 하찮다.


만약 김태희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면 다 그 여자랑 결혼해야지.

그런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은 그에 한참 못 미치지 않는가.

적어도 하루에 한 번 거울을 본다면 김태희의 김 짜라도 꺼낼 용기가 있는가.


1년에 3천만 원을 벌면서 3천만 원짜리 차를 타면 사치다.

1년에 10억을 벌면서 1억짜리 차를 타면 검소한 건지 모른다.

세상이 만든 절대적 가치가 아닌, 내 삶에 맞는 상대적 가치로 필요 정도를 잡아야 한다.


물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는 게 쉽지 않은 걸 안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 건 그를 때리고 싶어 하는 인간 때문.

그러니까 맞고 견뎌낼, '미움받을 용기'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어른의 자세


'네 쓸모는 누가 정하지?'

유은실 작가의 [일수의 탄생]에 나오는 말이다.

일수는 어른이 될 때까지 어른이 되지 못했다.


'내 필요는 누가 정하지?'

난 이 글에서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스스로의 필요를 결정할 수 있는 '어른'인가.


이 태도는 꼭 물질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나를 알고, 한계를 인정하는 것.

이건 어른의 기본자세다.


당신은 알맹이어야 한다.

남이 만들어 놓은 껍데기에 들어갈 필요 없다.

"껍데기를 가라. 당신이 원하는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맞다.

사실 이 글은 외제차 3탄의 글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난 내 필요만큼, 능력만큼 샀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외제차 4탄의 글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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