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삐딱한 나선생 May 13. 2019

구색 맞추지 않겠습니다

뭘 하나 가지면 또 다른 하나가 보인다.

코를 높이면 눈이 들어가 보여 또 수술하듯.

그렇게 내 얼굴을 남의 얼굴처럼 만들고 싶진 않은데.



비어버린


작년에 24평에서 34평으로 옮겼다.

집이 넓어져 좋았지만 빈 공간이 휑했다.

마치 그 공간을 채워 달라는 듯이.


다른 가구는 옮겨왔지만 없던 물건은 구입을 했다.

소파, 식기세척기, 건조기, 로봇청소기.

살림살이의 워너비 3종 세트 전부.


식기세척기와 건조기는 아내가 아주 잘 쓰고 있다.

하지만 소파는 애들 장난감이 되었고, 로봇청소기는 장식품이 되었다.

TV를 안 보는 난 소파에 1분도 앉지 않고, 층간소음 대비 매트로 로봇은 돌아가지 않는다.


큰 집을 처음 옮겨보니 다 필요한 줄 알았다.

하나, 큰 집을 가지니 큰 집이 뭘 더 갖고 싶어 하더라.

물건이 하는 말을 잘 컨트롤하면 나를 더 채울 수 있을 텐데.



이상해진


벨트를 하나만 썼듯, 가방도 하나만 쓴다.

지금은 아내가 쓰던 빨간 키플링 가방을 멘다.

이게 가볍고 색도 좋고, 공간도 많아서 수납하기 좋다.


그런데 문제는 정장을 입을 때다.

정장과 캐주얼 스타일 가방이 안 어울린다.

난 솔직히 몰랐는데, 주변에서 몇 번을 말하더라.


뭔가 어울리는 가방을 사야 하나, 고민도 했었다.

그런데 막상 생각해보니, 그 안에 있는 카드 이런 건?

하루 잠깐 멋지려고 내용물 옮기고 신경 쓰고 더 귀찮다.


또 정장에 어울릴만한 가방은 까만 가죽 가방? 무겁고 비싸고..

내 키플링 가방이 이상해진 건 순전히 정장 탓이다.

정장이 요구하는 가방을 난 사지 않겠다.



그대로


이번 주 토요일에 벤츠를 받으러 간다.

아내는 설렘 반, 허세 반으로 말했다.

"그럼 나도 차에 어울리게 꾸미고 다녀야 하나? ㅋ"


나도 농담 반, 진지함 반으로 말했다.

"벤츠를 샀다고 그 차에 맞는 내가 돼야 하냐?

차 사면 값의 10%는 네 맘대로 쓰기로 했으니 그만큼만 꾸며라잉! ㅋ"


단지, 차를 바꿨을 뿐이다.

내 삶에 그것 말곤 달라질 게 없다.

난 여전히 빨간 가방에, 몇 천 원짜리 옷을 입을 거다.


난 차를 모시고 싶은 생각이 없다.

검정, 흰색 차 관리도 귀찮아서 은색 샀다.

새 똥도 떨어지고 꽃가루 날리겠지만, 난 자동세차 돌릴 거다.


https://brunch.co.kr/@darkarkorn8cnl/204

장난감을 쌩까고, 명품 앞에서 빽하고, 자동차를 똥차 만들 자신 있을 때 준다고 했다.

물건이 내 삶을 조종하게 두지 않겠다.

까짓 거 구색 따위 안 맞으면 어떤가.

내 삶은 물질의 구색 없이도, 그대로 충분히 살만한 걸.

매거진의 이전글 필요와 껍데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