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드러나는 순간

by 삐딱한 나선생

부부는 정으로 산다고들 한다.

사랑이라 말하기엔 뜨뜻미지근해진.

이 말이 억지로 산다는 표현은 아닐 것이다.

마음이 있다면 드러나게 될 테니.



무너진 나


너무나 힘든 날이었다.

일은 해도 해도 줄어드는 것 같지 않고.

무심하게 던지는 별것 아닌 타인의 말들을 곱씹게 되는.


집으로 돌아와도 여전히 지쳐있다.

그런 날 위로하는 건 역시 아내뿐이다.

오늘 하루도 고생했다고, 그들이 나쁘다고.


연애 시절부터 당신은 마음이 없다고, 사랑이 아니라고 구박하던 나다.

아내는 그때나 지금이나 건조하고 표현이 적다.

당신은 그대로인데 이젠 당신의 고마움을 안다.


내가 당신에게 다가갈 수 있었을 땐, 당신의 가만히 있음을 답답해했다.

내가 무너져 주저앉고 나서야, 당신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는다.

거기 항상 당신이 있어줬다는 것을.



사라진 너


벚꽃이 예쁘게 핀 봄날이었다.

내 마음은 이미 나무 아래에 있었다.

비가 오기 전, 꽃잎이 절정인 오늘 꼭 나가야 했다.


남편은 이왕 나간 김에 골프도 한 게임 치자고 한다.

저녁 먹고 골프까지 치면 많이 늦을 것 같다.

난 벚꽃만 보고 오기를 바랐다.


그럴거면 남편은 나가지 않겠다고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자신이 원하는 건 뺐다고.

오늘이 정말 제일 예쁜 날인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잠시 갈등을 겪고 돌이켜 생각해봤다.

벚꽃은 나에게 중요하지만 골프는 그렇지 않았다.

반대로 남편에겐 골프가 중요하고 벚꽃은 그리 크지 않겠지.


벚꽃이 만개하니까 남편이 눈에 들어온 나다.

남편과 함께 나가려 했지만 벚꽃이 중요했던 것도 맞다.

벚꽃이 내 마음 속에 너무 커져버려서 당신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골프를 치는 것도 당신의 취미에 맞춰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무엇이든 나와 함께 하려 했었다.

맛있는 걸 먹어도, 멋진 곳에 가도, 무엇을 배워도.


당신이 내게 다가올 때, 나의 이해심으로 함께한다 여겼다.

당신이 사라지고 나서야 당신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당신의 마음이 항상 나에게 오고 있었음을.



지켜준 우리


부부 모임을 하다보면 남자가 센 집도, 여자가 센 집도 있다.

육아에선 누구의 의견이 강하기도, 경제는 누가 주도하기도 한다.

때론 하나의 쟁점에서, 하루의 기분에서도 한쪽이 강했다 약했다 바뀐다.


여러 부부들 중에서도 정말 즐겁고 유쾌해 또 보게 되는 집이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둘의 사이가 따스하고 평화롭다는 것이다.

둘 중 누가 강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더 표현하고 이끌어가는 적극적인 사랑도 좋다.

더 이해하고 포용해주는 너그러운 사랑도 좋다.

그러나 나의 사랑방식만이 옳다는 사랑은 싫다.


차가웠던 나란 사람이 뜨거웠던 너란 사랑을 만나 쉽게 꺼지지 않는 따스함이 됐죠

정동하- 우리의 온도


미지근함은 식어버린 게 아닌 안정화된 상태.

뜨거운 나를 차분히 하고, 차가운 내가 따스해 진.

그런 너와 내가 온전히 녹아 고르게 퍼져있는 유연한 모습.


https://www.youtube.com/watch?v=XZ6iX7rpq2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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