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삐딱한 나선생 Mar 25. 2024

선생님에게 오기까지

우리 반 아이들은 총 19명이다.

작은 학교에서는 전교생에 버금가던 숫자다.

3학년 아가들이라 뭔 일만 있으면 선생님을 찾는다.



친해지고 싶어서


"저 핸드폰 새로 샀다요."

"어제 이모가 놀러 왔는데요. 어쩌고 저쩌고"

확실히 저학년일수록 선생님의 관심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런 마음을 어떻게 자를 수 있겠냐마는.

다 들어주다 보면 화장실도 못 가고 쉬는 시간이 끝난다.

학기 초라 생활부장, 학년팀장, 학급 일을 하나 처리하면 둘이 쌓인다.


"아이구. 그랬어~ 좋았겠네.

그런데 선생님 이거 일 좀 하고~~"

적당히 들어주다 좋은 타이밍에 끊어야 한다.


그래도 이렇게 좋고 순수한 마음으로 오는 건 괜찮다.

누가 다쳤거나 싸웠다면 내가 바로 개입해야 한다.

그 외에는 나에게 바로 오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



선생님이 편해서


"선생님 이거 물 좀 따주세요."

500ml 생수병을 가지고 왔다.

"얘들아~ 이거 딸 수 있는 사람?"

"저요~ 저요~" 서로 따겠다고 난리다.


누군가 성공하면 그 친구는 우리 반 '힘짱'이 된다.

"이제 나한테 바로 오지 말고 옆에 더 센 친구한테 부탁해~"

신발끈을 묶건, 미술 시간 종이를 접건 이런 방식으로 가능하다.


"선생님.. 이거 어려워서 못하겠어요."

"선생님!! 저 연필 없는데 어떻게 해요?"

"우선 짝에게 묻고, 앞뒤로도 안 되면 다시 말해요~"


물론 선생님이 해주는 게 빠르고 결과도 나을 것이다.

애들이 서로 우유를 뜯어주다가 터지는 경우도 있겠지.

그래도 나를 자기 개인비서 부르듯 아무 때나 불러대는 건 싫다.



선생님이 되어서


우리 반엔 선생님 제도가 있다.

과제를 먼저 끝낸 학생이 선생님이 되는 거다.

선생님이 되면 친구들을 확인하고 도와줄 수 있다.


나는 처음의 한두 명만 확인해 통과시킨다.

나머지 친구들은 '학생선생님'에게 검사를 받는다.

우리 반 모두가 선생님이 되면 쉬는 시간을 바로 가질 수도 있다.


미술 선생님은 그림을 얘기해 주되 그려줄 수는 없다.

수학 선생님은 방법을 알려주되 답을 말하거나 적어줄 수 없다.

그래도 통과가 되지 않는 학생은 남겨서 봐주거나 보충지도를 한다.


특정 수업이 아니라면 학생선생님은 회장, 부회장이다.

전담 수업 이동이나, 급식 검사, 안내문 확인 등을 해준다.

솔직히 똘똘한 리더가 나오면 학급 분위기 전반이 좋아진다.


국어시간, 문단의 짜임을 배운다.

"문단에는 중심문장과 뒷받침 문장이 있어.

중심문장이 문단 전체를 대표하는 거야.

그럼 우리 반의 중심, 대표는 누구일까?"

"선생님이요~~"

"고마워. 그렇지만 학생 중에선 회장, 부회장이야.

그럼 나머지 친구들은 뭐가 될까?"

"뒷받.. 침?"

"그래. 회장, 부회장이 말하면 모두가 뒤에서 같이 도와줘야 돼.

교과서를 준비하자고 하면 다들 꺼내고 서로 챙겨야지.

물론 회장님들도 명령이 아니라 꺼내자~ 권유로 말하고."


19명을 나 혼자서 가르친다면 벅차다.

나에겐 19명의 '작은 선생님'이 있다.

이순신에게 남은 12척보다 많다.



선생님에게 오는 길


아무리 좋게 말해도 결국 나 편하려는 거 아니냐.

이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은 없다.

아니, 오히려 편해야 한다고 말하겠다.


반에 문제아 하나만 있어도 교사의 혼이 나간다.

다른 친구들에게 쓸 에너지도, 따뜻함도 날아간다.

교사는 1명이지만 그 영향은 교실의 모두에게 미친다.


선생님의 시간을 누군가가 많이 차지하고 있다면 문제가 있다.

수업시간은 모두의 것이기에 발언할 기회를 공정히 준다.

선생님의 시간도, 마음도 공적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일은 스스로 해야 한다고 생각해.

만약 혼자 하기 벅찬 일이라면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아.

정말 급하거나 위험한 일이라면 선생님이 필요하겠지.

하지만 너희들이 너무 자주 부르면 나도 지치게 될 거야.


너희들이 선생님에게 오는 길은 훤히 열려있으면 좋겠어.

그러려면 그 길을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써서는 안 돼.

도시의 꽉 막힌 도로처럼 만들고 싶지는 않겠지?


너희들이 선생님에게 오는 걸 조심히 하는 만큼,

선생님이 너희들에게 다가가기는 쉬워질 거야.

는 때론 응급차가, 소방차가 되어 너희를 구하러 갈게~"

매거진의 이전글 어른이 된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