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삐딱한 나선생 Apr 23. 2024

한 단계 위에서의 토론

3학년 국어시간 중심 문장, 뒷받침 문장을 배운다.

보호색을 가진 동물에는 애벌레, 나방, 개구리, 눈신토끼가 있다.

아래의 나열은 좀 쉬워도 모두를 포괄하는 상위 단어를 찾는 건 어렵다.



한 단계 위의 말


"딸기, 사과, 배를 포함하는 단어는 뭘까?"

"과일이요~~"

우르르 대답이 나온다.


"그럼 사과, 감, 도마뱀은 뭐로 합쳐질까?"

"음... 식물? 아니 파충류? 아니..."

많이 헤매다가 동식물이라 말하는 친구가 나왔다.


"맞아~ 비슷한 것끼리 있다가 다른 게 나오면 헷갈리지.

너희도 일기를 쓰다가 갑자기 다른 걸 말하곤 해.

밥 먹는 얘길 쭉 하다가 게임을 했다거나.


제목은 '유채꽃 구경'인데 민물고기를 보러 가기도 하고.

유채꽃을 보러 갔다가 먹고, 놀이기구 탄 거는 괜찮아.

그런데 완전 다른 이야기가 들어가면 주제가 바뀌어.


유채꽃에 민물고기가 합쳐지면 그냥 '삼척 여행'이 될 거야.

너희들이 겪은 일을 그냥 편하게 줄줄 쓸 수는 있어.

그 일들의 한 단계 위의 단어가 제목이 된단다."


물론 아이들의 어휘력이 부족해서 그럴 수도 있다.

낱말의 개념을 아는 어른들에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단어를 넘어서 한 단계 위를 볼 줄 아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위를 말하는 아래


대학교 4학년, 임용 시험 즈음 되어 투쟁을 했다.

교육부에서 선발인원을 대폭 줄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적체가 많은데 더 심각해졌다.


4학년 전체가 대강당에 모여 회의를 했다.

대부분 수업을 빼고 투쟁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 과는 도저히 투쟁에 참여할 수 없다고 했다.


그 과는 수업에 빠질 경우 교수들이 전부 F를 주겠다고 했단다.

그 교수들은 악명 높아서 다른 과에도 F폭격기라 불리고 있었다.

그냥 수업을 빠지고 학점을 조금 포기하는 정도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나 회의장은 점점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너네만 힘든 줄 아냐! 우리도 유급을 감수하고 투쟁하는 거다.

전쟁이 두려운 건, 적에 대한 공격보다 싸우지 않는 아군을 향한 공격이다.


나는 이 상황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과대표도 아닌 일개 학생이지만 손을 들었다.

당시엔 머릿속에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만 뱉은 것 같다.


"저는 저 과가 아닌 다른 과 학생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 과를 몰아가는 건 옳지 않습니다.

일부러 투쟁에 참여하지 않으려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끼리도 설득하지 못하는 투쟁을 밖으로는 어찌 설득하겠습니까."


실제 일반 여론엔 지들 밥그릇 투쟁 아니냔 얘기도 많았다.

당시에도 교사의 입지란 존경보단 그냥 철밥그릇 공무원에 가까웠다.

투쟁의 구호로 걸었던 '공교육 사수, 1인당 학생수' 등 교육적 의미는 닿지 않았다.

그리고 내부의 싸움은 아래에 머물렀다.



한 단계 위의 삶


물론 철없는 대학생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나도 당시 어렸고, 고작 말뿐이었고, 이끌지 못했다.

또한 삶의 투쟁은 그리 논리적이지도 이상적이지도 않다.

그럼에도 난 한 단계 위의 사람이 결국 승리하리라 믿는다.


난 교실에서 싸움이 일어나면 "친하니?"라고 묻는다.

"안 친한데요"

"그럼 너희들은 아직 이런 장난을 칠 관계가 아니야.

친해지기 전까지는 서로 예의를 지키고, 말도 꼭 필요한 것 아니면 하지 말아라."


"네. 원래 친해요."

"그럼 너희들은 그 관계를 고작 이런 걸로 깨고 싶니?

지금 이런 걸로 더 따지면서 싸울 거니? 아님 빨리 화해할 거니?"

"음.. 미안해~"


정말 별거 아니다.

대강 듣다 보면 저 두 종류로 종결이다.

정말 큰 사안 아니면 굳이 시시콜콜 듣지 않는다.

어떤 다툼도 결국 친함의 관계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싸우고, 시비 걸고, 이르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

고작 자기만을 보는 사람이 친구, 교실 분위기, 선생님을 보는 사람을 어떻게 이기나.

어린 초등학생이어도 하는 걸 보면 그 수준의 차이가 명확하다.


난 100분 토론을 즐겨본다.

토론을 잘하는 건 누구 편을 들어서가 아니다.

나와 다른 생각이었어도 더 큰 세상을 말해주면 귀가 열린다.

각자 자신이 본 현상을 말할 때, 더 높은 차원의 본질을 말해주는 사람이 있더라.


간혹(때론 자주) 국민을 위한다 말하고 자기편의 이익을 챙기는 정치인이 보인다.

말의 논리는 옳지만, 그것을 누구에게 어떻게 적용하는지가 문제이다.

결국 그 사람의 진정성은 말이 아닌 삶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토론은 정반합의 위로 올라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문화이다.

나 또한 고작 남자 편, 교사 편에 서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

적어도 인간으로, 이를 넘어 생명, 지구, 환경, 우주에 이르기를.


"당신이 학생이건, 교장이건, 여자건 그저 사람으로 대하겠습니다.

당신도 나를 성별이나 나이 어떤 조건을 떠나 사람으로 봐주세요.

그러면 우리는 한 단계 높은 사이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태도는 지각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