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에게 치이고 부딪힌 연약한 삶의 존재여 여행을 떠나라
회사를 다닐 때 늘 꿈만 꾸던 것이 있었다. 바로 '혼자 떠나는 여행'이다.
(가족이 싫다거나 불편해서는 결코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늘 누군가와 함께하는 생활, 사람들 틈에 부대끼는 일상에 익숙해져 있다 보니, 역설적이게도 없는 것을 갈망하듯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해졌다. 마흔이 넘어 세상에 익숙해질수록 그 간절함은 더 커져만 갔다.
시간이 비로소 허락된 지금, 망설임 없이 항공사 앱을 켰다. 목적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한라산이 있는 제주도. 사실 평소의 나라면 제주도를 여행지로 꼽지 않았을 것이다. 물가가 비싸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산과 자연을 좋아하다보니, 겨울 한라산의 설경을 직접 보고 싶다는 열망이 그 모든 이유를 덮었다. 학창 시절 단체 여행으로 끌려갔던 기억 말고, 내 발로 온전히 딛는 한라산을 만나고 싶었다. 지난 제주 트레일런 대회 때 70km 둘레길을 달리며 느꼈던 그 숲의 서사가 나를 다시 이곳으로 불렀다.
시간이 많은 자의 특권은 '타이밍'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시간이 아닌, 항공사가 빈자리를 내어주는 가장 저렴한 평일 저녁 시간대를 골랐다. 왕복 6만 원대. 2월 가족 여행 때의 예상 비용과 비교하면 놀라운 금액이다. 와이프조차 그 가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녁비행기로 전날 여행 준비를 마련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출발 당일 아침부터 부랴부랴 산에 오를 준비물을 준비했다. 등산바지, 상의 여러벌 (더울 때 벗을 수 있게 여러 Layout으로 준비), 세면도구 등
늘 가족 여행때는 와이프가 준비해준 여행물품들을 직접 준비하려고 하니 귀찮기도 하다.
떠나는 날 아침, 와이프가 챙겨주던 짐을 이번엔 혼자 꾸렸다. 등산 바지, 레이어드할 상의들, 세면도구... 혼자 하는 여행의 목표는 '최소 비용, 최대 효율'. 숙소 역시 잠만 잘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로 잡았다.
낯선 이들로 가득한 게스트하우스는 내향적으로 변한 내게 여간 불편한 곳이 아니었다. 늦은 밤 도착해 2층 침대에 짐을 풀며, 삐걱거리는 소리에 행여 남들이 깰까 숨을 죽였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는데, 옆 침대 누군가는 곤히 잠에든 깊은 숨소리가 들려 부럽기만하다. 아래층 사내도 잠이 안 오는지 내 움직임에 삐걱 소리로 응답했다. 묘하게도 그 소리가 위로가 되었다. 나만 깨어있는 게 아니라는, 이 낯선 곳에 나처럼 잠 못 이루는 누군가가 있다는 묘한 동질감.
잠깐 눈을 감았다 나의 시계에서 진동으로 알람이 울린다. 깜짝 놀라 알람을 끄고 시계를 확인해보니 4시 30분. 그렇다 잠이 안올 것만 같은데 그래도 가벼운 선잠으로 시간이 지나갔나보다. 한 3시간 정도 잠을 잔 것 같다. 제공 받은 수건이 있어 어제 씻지 않고 잔 스스로의 불편함? 그리고 숙소를 이용했는데 샤워 한번 정도는 해야 왠지 모를 지불에 대한 보상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몸을 씻는다.
샤워를 하고 나왔을때 실망스러운 소식이 들렸다. "기상특보로 삼각봉 대피소까지만 탐방 가능" 백록담을 보기 위해 서울에서부터 날아왔는데, 입산 부분 통제라니 허탈했지만 방법이 없다. 자연이 허락한 곳까지만이라도 가보자는 마음으로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 관음사 탐방로로 향했다.
준비해온 헤드렌턴을 밝히고 관음사 탐방로 부터 올라가기 시작한다. 해가 뜨지 않은 상황이라 정말 어둡다. 혼자서 산행을 시작했다면 무서울 수도 있을 정도인데, 함께 오르는 젊은 친구들이 꽤 있어서 어둠과 산에 대한 공포는 내려놓을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해는 7시 25분에나 뜬다고 되어 있다. 자연을 즐기러 온건데 어둠속에 거리수가 줄어드는 상황이 다소 아깝기만하다. 하산길에 즐길 장소라 생각하며, 꾸준히 산을 오른다. 그렇게 가파르지 않다. 충분히 즐기면서 오를 수 있는 곳이다. 중간 중간 표시되어 있는 표지판에 내가 얼만큼 올라왔는지 보여주는 것이 나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소통이었다.
날이 밝아오며 드러난 설산의 풍경은 경이롭다. 중간에 경사가 높아지는 시점에는 아이젠을 착용하며 문득 2주전 관악산에서의 낙상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무엇에 홀린듯 엎어져서 한 2m정도 아래로 미끄러진 기억이 있다. 멀쩡히 걷고 있는 순간 돌을 발고 넘어지더니 흙길에서 벗어나 아래로 굴렀다. 내 눈에 빙글 도는 그 상황 그리고 언제 까지 떨어질까? 하던 그 상황이 너무나 생생했고 같이 있던 친구들이 깜짝놀라 아래로 떨어져 있는 나를 보고 놀라던 모습이 기억난다. 혼자였으면 아찔하다 다친곳은 없지만 산은 언제나 겸손해야 함을, 절대 방심해선 안 됨을 되새기며 한 걸음 한 걸음 눈 덮인 얼음 길을 밟으며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살아있음이 느껴졌다.
2시간 남짓 올라 도착한 삼각봉 대피소. 백록담으로 가는 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쉬움이 컸지만, 삼각봉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기고 준비해 온 김밥을 먹으며 마음을 달랬다. 아내와 친구들에게 생존 신고를 하고 잠시 대피소 안의 사람들의 간식과 식사의 다양함을 넌지시 구경하며 몸을 녹이고 하산길을 준비한다.
하산하는 길은 자연을 즐기면서 내려 왔다. 설산이 주는 깨끗함이 나의 지친 몸과 마음을 깨끗히 해준다. 그리고 이 청량한 바람이 가져다주는 공기는 비록 차갑지만 나의 폐를 깨끗히 정화해주는것 같아 크게 쉬고 내셔본다. 따듯한 공기보다 맑고 청량한 시원한 공기가 좋다. 따듯한 공기는 세상의 거침이 주는 데쳐진 공기 같아 싫다. 타인이 내쉬지 않은 자연이 제공하는 공기를 마시고 싶을뿐이다. 그렇기에 산이 좋다. 그것도 겨울 한라산의 공기는 나에게 새로운 시작의 기대감을 불러온다.
비록 정상에는 닿지 못했지만, 나는 충분했다. 자연이 허락한 만큼만 즐기는 법을 배웠고,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으니까. 2월에는 꼭 백록담을 만나리라 다짐하며, 따뜻한 짬뽕 한 그릇으로 30시간의 짧은 여정을 마무리했다. 여행이란 완벽하지 않아도 미련이 남는 것. 그래서 소중하다.
다음에 백록담을 보러 꼭 다시 오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