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크라이트 Oct 08. 2021

손해보는 게 마음 편한 사람들

‘싫은 소리’ 하는 게 제일 힘들어

손해보는 게 마음 편한 사람들이 있다. 

..사실, 그건 바로 나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손해를 보든 말든,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한다.


점원이 실수로 거스름돈을 잘못 거슬러줘도, 상사가 부당한 이유로 싫은 소리를 해도, 전화 너머 고객센터 직원이 불친절해도 한마디 따질 줄 몰랐다.


이유는 단순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남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다’는 무의식적인 욕구였다. 타인에게 싫은 소리를 하는 것보다 내가 손해를 보는 게 더 마음이 편했기에 늘 그렇게 살아왔다. 그냥 나 하나 꾹 참으면 평화롭게 넘어갈 수 있으니, 우주의 질서(?)를 깨지 않기 위해 참는 게 습관화가 된 것이다. 일명, ‘호구되기 딱 좋은 스타일’ 이 아닌가?


그런 삶이 평온했기에 20년 간의 세월을 그렇게 지내왔는데..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삶의 태도를 유지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불쑥 불쑥 올라왔다.

점점 나 하나 손해보는 상황이 아니라, 나와 연관된 주변인들까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걸 가장 먼저 깨달은 건 회사에서였다. ‘대리’ 직함을 단 이후부터, 거래처와 연락을 주고 받을 상황이 굉장히 많아졌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거래처 담당자가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마감 시간을 최대한 당겨 달라든지, 업무 범위에 벗어나는 일을 지시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담당자에게 최대한 맞춰주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업무 부담은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그리고 그 짐덩이는 나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사원들에게까지 고스란히 전가됐다. 점점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바보같게도 그 당시에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했다. 수없이 많은 날, 함께 야근하며 저녁밥을 먹어야 했던 사원분들, 진심으로 미안했어요.


취미로 가입한 동호회에서 얼떨결에 운영진을 맡고 나서도 ‘싫은 소리’를 해야 할 순간은 끊임없이 펼쳐졌다. 남들에게 거리낌없이 무례한 말을 하는 회원들, 신분을 속이고 접근해 포교 활동을 하거나 모든 이성에게 집적거리는 회원들을 처리하려면 ‘싫은 소리’ 하는 능력은 필수였다. 때로는 유연하게, 때로는 단호하게. 그러지 않으면 모임에 존폐 위기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행히도 대부분의 경우 야무진 모임장이 책임감을 갖고 ‘싫은 소리’ 담당을 도맡아 주었기에, 큰 짐을 덜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태도를 바꿔야겠다고 느낀 건 ‘가족’ 때문이다. 에어컨을 구입할 때 바가지를 쓰고, 이사 업체가 가구를 망가뜨리고, 부동산 중개인이 ‘제가 언제 그리 말했어요?’ 라며 시치미를 뗄 때 그냥 넘어간다면? 이는 나 혼자만의 손해로 끝나지 않는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여느 때처럼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해 금전적인 손해를 본 날, 남편이 답답해하며 내뱉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 이리 책임감이 없어!”


그랬다. ‘싫은 소리’를 해야 할 상황에서 그러지 못한다는 건, ‘책임감이 없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그들이 어떤 부당한 짓을 하든 그대로 감수하겠다는 일종의 ‘포기’라는 것을. 더불어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의지를 걷어찬 행위였다. 나의 정당한 권리에 대해 주장을 할 수 있어야만 나와 내 주변인들을 지키고,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할 수 있다.


그걸 깨달은 뒤부터는, 반드시 필요한 상황에서는 ‘싫은 소리’를 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애쓰고 있다.


사실 아직도 그런 상황에 닥치면 참으로 괴롭다. 전화로 따져야 할 일이면 미리 대사들을 써둔 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번호를 누른다. 얼굴을 마주보는 일은 더 많은 준비를 필요로 한다. 온갖 시뮬레이션을 머릿 속으로 돌려 본 뒤 말을 꺼낸다.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초조한 손끝을 숨기기 위한 노력은 필수다.

이렇게 의식적으로 많은 노력을 해야 하기에, 남들 눈치 보지 않고 '싫은 소리'를 매너있고 당당하게 피력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부럽다. 그들도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 저럴 수 있는 거겠지? (타고난 성격이라면 매우 부럽다.)


가까운 사람들과 사랑하는 이들에게 더이상 손해를 끼치고 싶지 않기에, 오늘도 단단히 마음을 먹어본다.

오늘도 또 한 번 느낀다.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는 왜 이렇게 잡념이 많을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