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 갇힌 당신에게

-연극 타클라마칸 리뷰

by 파도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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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이 시작되면 남녀가 등장하고, 무대 한가운데에는 짐을 가득 실은 차(로 추정되는 물체)가 있다. 차가 길 중간에서 멈추어 버렸고, 여자는 차를 움직여 보려 애쓰지만 실패한다. 반말을 하며 가까운 사이처럼 대하는 여자와 달리 남자는 여자에게 계속 존대말을 하며 어색함을 표한다.


여자는 남자가 '해리성 기억상실'진단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자는 그 진단을 믿지 않는 듯하다. 자기가 너무 무심했다, 그동안 미안했다, 이제 쇼를 그만두라고 말하며 답답해한다. 그렇게 서로 말은 하지만 상대에게 가 닿지 않는, 대화라 볼 수 없는 발화가 이어진다. 그러다 날이 어두워지고, 이들은 모닥불을 피운다. 춥고 어두워지자 마음이 녹아내린 듯 스킨십을 하는 여자를 뿌리치며 남자는 멀리 떨어지고 여자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핸드폰을 통해 대화를 시작한다.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설명하고 추억을 곱씹지만 남자는 회상을 통해 기억을 되찾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둘을 바라보는 관객은 그저 답답할 뿐이다.


배경은 명확히 드러나 있지 않지만, 이 둘이 여행을 떠나는 중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제목을 통해서 관객은 그들이 타클라마칸(Taklimakan)에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게 된다. 영국의 면적보다 넓은 이 사막은 높이 100m 안팎의 크고 작은 사구가 이어지고, 이 모래 언덕이 바람에 밀려 이동하기 때문에 옛날부터 교통의 큰 장애가 된 곳이다. 그래서 고대 실크로드를 오가며 낙타로 이동하던 상인들도 이 곳만은 피해 갔다고 한다.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다시는 나올 수 없다.'라는 뜻이 의미심장하다.

%EB%8B%A4%EC%9A%B4%EB%A1%9C%EB%93%9C.jpg <타클라마칸 사막. 출처는 네이버 지식백과>

남자는 기억을 되살리려는 여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만 반복한다. 그러나 때로 다른 반응을 보일 때가 있다. 여자가 '감정'을 건드리는 부분이다. 이는 기억이 단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와 미래의 시간 속에서, 우리가 접하는 것들은 우리의 과거 경험을 통해서 다르게 인식된다. 같은 것을 보아도 우리가 다르게 인식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다른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기억은 경험이고 감각이다. 기억은 서술이나 묘사가능한 형태일 때만 유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른 것들은 기억하지 않을 수 있어도, 함께 보았던 공포영화, 좋아하던 노래, 키우다 죽은 강아지를 화장하던 날. 그런 것들이 주었던 느낌은 여전히 그의 안에 남아 있다. 이런 것들은 "고기를 먹고 나면 옷에 냄새가 배듯" 몸에 배어 버린 것이기에, 그런 느낌들을 자극하는 그녀의 말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기억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자가 기억을 되찾는 부분은 클라이막스다. 여자가 건드리는 추억이 딸의 존재에 이르는 순간 남자는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폭발하며 '기억을 되찾는다', (혹은, 기억나지 않는 척 하기를 포기한다). 자신의 삶을 가르는 순간으로서의 딸의 죽음은 기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에게 새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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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상실을 겪고 있는 남자와 그 남자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여자의 노력. 갈등을 가장 단순화하면 이렇게 보이겠지만 이것은 단순히 기억의 상실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남자에게 딸은 단순히 사랑하는 자식이라는 의미 이상이었다고 느껴졌다. 남자가 진술하는 과거의 남자의 삶은 대부분의 우리네 부모의 삶과 다르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기에 열심히 살았고, 내가 열심히 하면 국가가 발전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나보다 공동체, 집단이 우선시되던 사회였기에 국가가 발전하는 것이 곧 나의 기쁨이 되는 것이라고 교육받으며 살았다. 자아의 발전, '나'라는 사람 개인의 성취가 크게 권장되지 않던 사회 속에서 개인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곳은 가족이었다. 나는 힘들어도 자식이 힘들지 않기를 바라며 모든 것을 자식에게 투영하는 부모들의 모습은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었다. 내 자식만큼은 나와 다른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에, 자식이 곧 내 삶이 된다.


그렇기에 그렇게 아꼈던 딸의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나 다를 바 없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더 이상의 삶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렇기에 남자는 그동안의 자신의 삶을 부정한다. 자신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살았을 뿐이라며 자신의 시대를 회상하는 남자의 모습에서는 억울함과 회한이 비친다. 자신이 살아온 삶을 돌이키면서 후회가 적은 사람을 만나기는 쉽지 않겠지만, 남자의 후회에서는 삶의 의미를 잃은 자의 고통이 느껴진다. 남자는 여자에게 보이는 것만 보지 말고 나를 '보라'고, 들리는 것만 듣지 말고 실제로 '들으려 하라'고 말한다. 지금의 남자는, 여자의 아내이고 진아의 아빠였던 그 때의 남자와는 달라져버렸음을 말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남자가 계속해서 사진을 찍으려는 것은 그동안 보이는 것만 보았던 그의 눈 대신 스스로 선택한 세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와 같다.



그쪽이 보고 있는 건 그쪽이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보이는 나인거죠. 주위를 둘러보세요. 흙, 풀, 길, 하늘.... 보이죠? 이건 보이는 겁니다. 보이는 대로 인지하는 겁니다. ... 생각을 멈추고 저를 보세요. 그냥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내 눈을 맞추고 나를 보세요. 그러면 나를 알게 될 겁니다.



타클라마칸은 그저 상징에 불과하다. 극의 제목을 타클라마칸으로 설정한 것은 관객들에게 그런 이미지를 주기 위한 것일 뿐, 실제로 이들이 길을 가다 멈추어 버린 곳이 타클라마칸이라는 말은 극 중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만약 정말 사막으로 보이고 싶었다면 배경이나 장치가 조금은 달랐지 않았을까. 타인에게 긴급 구조를 요청할 가능성도 있고, 펜션 주인과 통화도 가능한데.. 그들이 사막에 있다는 것은 딱히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아니, 이미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들이 실제로 여행하다 멈춰버린 곳은 사막일 수도, 사막이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정체를 명확히 알 수 없는 곳에 그저 '놓여' 있다는 사실일 뿐이다. 이들을 찾을 수 있는 지표가 되는 것은 바위이지만 그 바위의 모양조차 하나로 딱 떨어지게 묘사할 수 없다. 갓 모양이기도 하고, 사람이 누워있는 모양이기도 하다.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이고, 또 그것이 언제 어떻게 달라질 지 모르는 곳이기에 이 곳에서는 서 있는 곳을 구별하여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구별이 필요하지 않은 곳에서 이름이 필요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이들이 갇혀 있는 곳은 황량한 기억의 사막이다. 실제 중국 신장웨이우얼 자치구 서부 타림 분지에 있는 그 사막이 아니다. 그들이 차 위에 잔뜩 실어놓은 것은 단순한 짐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왔던 흔적이고 기억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딸이 죽은 이후부터의 현실을 차마 감당하고 살아갈 수가 없어서 기억의 사막에 갇혀 있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부는 어떻게 될까? 과연 타클라마칸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는 재미없고 막연하지만, 그래도 기대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희망에 기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힘든 일을 겪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든 지금을 극복하고 일어서기를 바란다. 나와 연고가 없는 사람인데도 그렇다. 그리고 재기해낸 사람들을 응원하고 대단하게 여긴다. 그것은 그렇게 다시 일어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일이고, 또 그 모습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울림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괴롭고 힘들어 그저 침잠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렇기에,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남을 괴롭히는 대신 스스로를 타락시키는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삶을 포기한 것에 대한 경멸이 아니다. 안쓰러움이다. 타클라마칸에 스스로 몸을 맡기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다. 스스로 갇혀 있기를 택해도, 당신을 다시 자극할 수 있는 것들은 사방에 놓여 있다. 실연한 이후 그 사람과 비슷한 뒷모습에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 같았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당신 역시 극 속의 남자처럼 무너져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짧다면 짧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낀 것은, 분명히, 이것도, 지나간다는 것이다. 너무나 괴롭고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순간조차도 과거의 일이 되는 순간 그 아픔은 분명 덜해진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아픔 덕분에 진정한 나를 찾게 되기도 한다. 타클라마칸이 주는 교훈은, 그곳이 위험한 곳이니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그곳에 들어가더라도 당신은 무조건 나올 수 있으니 절대 무너지지 말라는 것이다. 비록 남루한 차림새에 온 몸이 더럽혀져 있을지언정, 당신은 더욱 나은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니 타클라마칸을 눈 앞에 두고 있는 당신, 혹은 타클라마칸에 갇혀 있는 당신에게 말하고 싶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고. 어떻게든 불을 피우고 물을 마셔 꼭 살아남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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