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관계에는 강자와 약자가 있다. 흔히 더 사랑하는 사람, 덜 사랑하는 사람으로 그런 위치를 구분짓기도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자아의 강도로 정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대를 많이 사랑하더라도 사랑이 삶에서 전부가 아닌 사람은 관계에 목맬 필요가 없다. 나는 이 사람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그 상대에게 목맬 필요가 없다.
사랑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게 무엇인가의 차이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발생한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마음껏 좋아할 수 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하지만 자아가 위태로운 사람은 나의 사랑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무언가로부터 그 사랑을 계속해도 괜찮다고, 너의 사랑이 불행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입증을 받지 않고서는 불안을 쉽게 해소하지 못한다. 무언가에 빠지면 그것에 대한 생각만으로 하루를 채우게 되는 것은, 쉽게 스스로를 어딘가에 흠뻑 적시는 것은, 스스로가 하얗게 비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자각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늘 약자의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스로 존재가치가 있는 사람인가에 대한 고민을 평생 안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살아서 좋을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굳이 살아야할 이유도 없다고 믿었던 오랜 시간 동안 내가 내린 결론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결국 외부적인 타율성에 그 결정을 위임해 버리는 것 뿐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이런 나라도 소중히 여겨 준다면, 그래도 살아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를 살뜰히 챙기는 것만큼은 늘 자신이 있었고 집단에서는 좋은 언니 좋은 누나였다. 당신 덕분에 잘 해결됐다고, 당신이 내 인생에 들어와 빛이 되어주었다고, 당신과 있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고, 나와 있어주어 고맙다고.. 그런 말을 해 주는 사람이 내게는 필요했다. 그것만이 나를 살게 하는 이유였으니까.
그러다 보니 나는 늘 인생에서 '사랑'이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컸다. 대부분의 나의 삶은 특정한 목표를 지향하고 그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었고 그렇기에 성취가 우선시되어 오기는 했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것이었다. 사랑은 나의 성취보다 대부분 더 큰 비중을 차지했다. 자아가 확립되기 시작할 무렵부터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가졌고, 애태우고, 기다리고, 다가가고, 물러나는 모든 과정들이 나를 성장시켰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비로소 완전해져서 다른 모든 것들도 잘할 수 있게 되었고, 외로운 상태의 나는 무력해지고 무기력해졌다. 그렇기에 늘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었고 그 사람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였다. 그리고 나와 오랜 시간 관계를 맺었던 사람은 보통 나의 그런 사랑 방식을 고마워하고 즐겼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수 차례의 사랑을 거치고 인생의 질곡을 겪은 '어른'에게는, 사랑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그저 또 다른 하나의 관계에 불과한, 감정의 사치여야 하는 것만 같다. 불같은 사랑, 네가 없으면 못 살
것만 같은 사랑 같은 건 너무나 소설 속 이야기다. 책임져야 하고 신경써야 할 것들이 많아져서 사랑에 모든 걸 쏟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 속에서 너무나 찌들어 버린 탓일까. 어른들은 사랑 앞에서도 모두 강자가 되어 버린다.
문제는, 나 혼자만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여전히 즉각적으로 상처받고 불같이 사랑하며 감정에 솔직하고 싶어한다. 그러다 보니 상대의 거리두기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 나는 이렇게
계속 너를 생각한다고, 더 함께이고 싶어하는데 너는 왜 그렇지 않느냐고 슬퍼한다.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관계의 비대칭성을 불평등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은 곧 불안을 자아낸다. 돌보아 줄 사람을 잃어버린 어린아이처럼.
어리석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모두 어른이 될 준비 없이 어른이 되어 버리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다른 방식의 어린아이가 숨어 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보듬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내심 갈구한다. 나를 사랑해 주고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 앞에선 그런 모든 것을 드러내고, 사랑받음으로서 충만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마냥 강해지기만을 요구하는 사회 속에서, 약해도 괜찮은 관계란 얼마나 달콤하고 포근한가.
그런 감정의 교환이 가능하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것, 내가 그 안의 어린아이를 보듬어줄 수 있고 그가 내 안의 어린아이를 보듬어줄 수 있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두 사람의 마음이 맞는 것보다 마음이 엇갈리는 일이 훨씬 쉽고, 마음이 맞더라도 시간이, 공간이 엇갈리는 탓에 행복으로부터 멀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당
연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이 고마워진다. 지금 내 앞에 당신이 나를 보고 웃는 사실 자체가 감사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의 곁에 있다면, 그저 마음껏 사랑하자. 약한 모습을 보이는 그 사람의 용기 앞에서 당신 역시도 한없이 약해질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서로의 허전함을 채워주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자. 적어도 그 사람 안의 어린아이를 보듬어줄 수 있는 건, 바로 당신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