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노래는 당신의 목소리로 끝이 났다.
부산에서의 첫 주말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일요일 내내 나는 밀린 잠을 자거나, 익숙지 않은 주방에서 서툰 요리를 하며 시간을 죽였다.
월요일이 오자, 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갑옷을 챙겨 입듯 셔츠를 다려 입고 사무실로 향했다. 일에 몰두하는 것은 감정의 소모를 막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나는 회의에 집중했고, 보고서를 검토했으며, 후배의 질문에 명료하게 답했다. 누구도 내 안에서 어떤 균열이 일어나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물론 나 자신조차도 그랬다.
문제는 일이 끝난 뒤에 찾아왔다.
텅 빈 오피스텔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 완벽한 고요가 만들어내는 소음이 두려웠다. 퇴근 후, 나는 정처 없이 차를 몰았다. 화려한 해운대를 벗어나, 조금은 낡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동네로 접어들었다. 보수동 책방골목 근처였다. 좁은 골목길에 헌책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퀴퀴한 종이 냄새가 공기 중에 배어 있었다. 나는 차를 세우고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우연히, 헌책방들 사이에 숨어있는 작은 레코드 가게를 발견했다. 간판의 페인트는 벗겨져 있었고, 쇼윈도에는 먼지 쌓인 턴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묵직한 나무 냄새와 오래된 비닐 냄새가 훅 끼쳐왔다. 가게 안에서는 나지막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나는 마치 다른 시간대에 발을 들인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주인으로 보이는 백발의 노인은 나를 한번 힐끗 쳐다볼 뿐, 다시 신문을 읽는 데 몰두했다. 나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빽빽하게 꽂힌 LP판들을 천천히 구경하기 시작했다. 비틀즈, 퀸, 김광석… 익숙한 이름들 사이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나아갔다. 무언가를 찾으려는 목적은 없었다. 그저 이 행위 자체가, 이 무의미한 시간의 흐름이 필요했다. 손끝에 닿는 앨범 재킷의 각진 모서리들이, 형태 없는 내 불안을 잠시나마 붙잡아주는 듯했다.
그러다 문득, 한 앨범 앞에서 내 손가락이 멈췄다. 흑백 사진 속, 젊은 남자가 트럼펫을 든 채 고뇌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쳇 베이커(Chet Baker). 앨범 타이틀은 <Chet Baker Sings>였다. 나는 홀린 듯이 그 앨범을 꺼내 들었다. 딱딱하고 네모난 재킷의 감촉, 모서리의 낡고 해진 흔적. 그 순간, 잊고 있던 시간의 댐이 무너져 내렸다.
스물다섯의 어느 늦은 가을,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나는 막 제대를 하고 복학한 상태였다. 군대라는 거대한 통제 시스템에서 벗어났지만, 세상은 여전히 나에게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동기들은 이미 나보다 훌쩍 앞서가 있었고, 어린 후배들의 들뜬 분위기는 나와는 무관한 세계의 일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늘 도서관 구석 자리나, 학교 앞의 조용한 카페로 숨어들었다. ‘필름 속 풍경’이라는 이름의 작은 카페. 나는 그곳 창가에 앉아 두꺼운 전공 서적을 읽으며 나만의 성벽을 쌓아두고 살았다.
그날도 나는 성벽 안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빗줄기가 창문을 두드렸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젖은 거리를 지나갔다.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세상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투명한 막을 느끼고 있었다.
그때, 선율이 친구들과 함께 카페로 들어왔다. 우산을 접으며 꺄르르 웃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한 카페의 공기를 단숨에 휘저었다. 마치 흑백 영화 속으로 뛰어든 컬러 필름처럼, 그녀의 존재는 압도적이었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와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밝고, 소란스럽고, 거침없는. 내 고요한 세계를 위협하는 침입자.
얼마 뒤, 카페 주인이 LP를 갈아 끼웠다. 스피커에서 쳇 베이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My Funny Valentine’. 힘을 뺀 채 나른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와, 그 목소리만큼이나 여리고 감성적인 트럼펫 연주. 시끄럽던 그녀의 테이블이 순간 조용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호기심 어린, 꾸밈없는 눈빛으로. 나는 당황해서 다시 책으로 고개를 숙였지만, 심장이 작게 쿵, 하고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녀가 내 테이블로 다가왔다. 비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 희미하게 샴푸 냄새가 났다.
“저기요, 이 노래 좋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쳇 베이커.”
“아, 맞다! 쳇 베이커. 목소리 진짜 좋죠? 꼭 속삭이는 것 같아.”
그녀는 스스럼없이 내 앞 의자에 앉으며 내가 읽던 책을 힐끗 봤다.
“우와, 이런 어려운 책도 읽으세요? 이런 책 읽는 사람들은 보통 되게 외로워 보이던데. 혹시 아니에요?”
그녀의 돌직구 같은 질문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누구도 나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나의 고독은 내가 선택한 것이고,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갑옷이었는데, 그녀는 너무도 쉽게 그 갑옷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외롭다기보다는… 혼자가 편해서요.”
“에이, 그게 그거 아닌가?”
그녀는 아이처럼 웃었다. 그 웃음에, 내가 쌓아 올린 성벽에 작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날, 비가 그칠 때까지 음악과 책, 그리고 서로의 꿈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그녀가 나와는 정반대로, 서울에서 고생 없이 자란 온실 속 화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솔직했고, 그녀의 웃음은 따뜻했다. 나는 내가 쌓아 올린 벽 너머로, 처음으로 누군가를 들여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사장님, 이거 얼마예요?”
내 목소리에 나 자신이 놀랐다. 노인이 신문 너머로 나를 바라봤다.
“그거요? 좀 귀한 건데… 3만 원만 주쇼.”
나는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건넸다. 레코드 가게를 나왔을 때, 부산의 밤거리는 여전히 낯설었다. 나는 낡은 LP판을 품에 안고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집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고, 싸늘했다. 나에게는 턴테이블이 없었다. 나는 그저 LP판을 꺼내, 거실 벽에 기대어 세워두었다. 마치 액자처럼. 흑백 사진 속 쳇 베이커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불을 끈 채 창가에 서서 도시의 불빛을 내려다봤다. 나는 이별을 결심했을 때, 모든 것을 논리적으로 분석했다고 믿었다. 우리의 관계는 수명을 다했고,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서로에게 더 효율적이라고. 나는 감정이라는 변수를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낡은 LP판 한 장이, 내 견고했던 논리의 성벽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웃음, 그녀의 향기. 그 모든 것이 노래와 함께 내 안에 봉인되어 있었다. 나는 그녀와의 관계를 떠나온 것이 아니었다. 내 인생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나조차 잊고 있던 순수한 나 자신을 통째로 도려내고 온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내가 저지른 일의 진짜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