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찾은 명상하는 사람
히라야마는 술집 사장의 전남편과 그림자 밟기 놀이를 하고서 돌아가며 미소를 짓는다.
그걸 보고 나는 생각한다.
'질이... 좋다.'
함부로 한 인간의 질을 평가하는 건 삼가야 할 일이지만, 감히 일단 '좋다'고 평가하고서 짚어본다. 경험의 질, 삶의 질, 사람의 질에 대해.
작은 것으로 입꼬리가 올라가고 나무의 움직임에 눈을 고정할 수 있다. 필름카메라와 카세트 테잎, 헌책 같은 옛날 것에 머무르면서 스포티파이 같은 최신 기술을 모르는 건 아무 상관이 없다. 아이 손을 잡고 엄마를 찾아줬는데 아이 손을 더러운 듯 물티슈로 벅벅 닦고는 인사도 없이 가버리는 아이 엄마를 보고도, 카세트 테잎의 소리를 처음듣는 젊은이들의 작은 표정변화를 보고도, 매일 보는 목욕탕 단골 할아버지들을 그저 보는 것 만으로도 입꼬리가 올라간다. 겉보기에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관조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꼭 그렇게 같은 표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되도록 말보다는 눈과 몸짓으로 말하는데도 소통에 모자름이 없는데, 그게 참 자연스럽다. 안에 많은 일이 일어났던 사람은 오히려 말이 줄어드는걸까 생각한다. 깊은 강물이 고요히 흐르는 것 처럼 말이다. 동생을 만났을 때 알 것 같았다. 깊은 강의 깊은 물이 그 안에 흐르는 것을. 내내 그의 눈을 보며, 마지막에는 니나 시몬의 음악에 같이 눈시울을 붉히며, 알지 못하는 그의 강물과 내 안에 있는 얕은 강물을 가늠했다.
헤세의 싯달타에서 뱃사공은 이 강물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고 있다고 했다. 그것이 AUM, 우주의 소리를 담은 만트라라고 했다. 히라야마의 침묵은 꼭 그 강에서 나온 것 같구나 생각한다. 그 강물을 채우는 동안 히라야마가 겪었을 지난 삶을 상상해본다. 그렇게 보면, 지금 헤매고 방황하고 여기저기 날을 세우고, 남탓을 하고 싸우며 사는 모두의 삶이 가치있다. 강물 속 허우적 거림에 여러 생을 소진해버릴지 모르지만, 그건 그저 낭비가 아니라 고스란히 강물이 끌어안겠지.
술집 사장의 전남편이 "그림자가 겹쳐지만 더 짙어질까요?" 하고 물으니, 히라야마는 반가운 질문을 만난듯 했다. 직접 해보자며 남자를 가로등 앞에 데려가 함께 서서 짙은 정도를 가늠하는데 의외의 강한 어조로 말한다. "더 짙어지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되잖아요." 강물이 끌어안은 어둠은 강물을 불어나게 하던지, 강 바닥을 깊어지게 할테지. 그대로라는 건 말이 안되니까.
나는 명상도 요가도 안하면서 명상가인 사람을 찾는 취미가 있다. 의외로 그런 사람들은 부 전문가나 학문의 정점을 이룬 이들 중에 많이 있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고, 술과 거친 음식도 조심하고, 에너지 뺏기는 인간관계도 단속하는 걸 보면 요기보다 더 요기같다. 심지어 내 경매 선생님은 새벽에 일어나 '아무것도 안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했다. 그분은 스스로 이미 명상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서, 나에게 명상을 가르쳐 달라고 하셨다.
이 영화에서도, 나는 다시 명상하는 사람을 찾았다. 자극에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는 사람, 거친 자극에 끌려가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렇게 관조하며 살면 명상하는 사람이 맞다.
나는 명상을 안내할 때 감각에 머무는 동안 '지금 여기'에만 머물게 되고, 실체가 아닌 다른 곳, 다른 시점으로 의식이 가지 않으니 그 자체로도 명상이 된다고 알려준다. 분명 듣는 이들은 헷갈릴거다. '감각적이다' 라는 말을 들으면, 약물, 술, 섹스 같은 자극이 떠오를테니까. 그럼 거침과 미세함 사이의 정도를 떠올려보면 된다. 요가에서는 세상이 근원으로부터 시작해 확장하면서 공-풍-화-수-지, 그러니까 공(에테르), 바람, 불, 물, 흙의 5원소를 이루며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흙도 감각이고 공도 감각인데, 우리가 '감각적이다'라는 말로 떠올리는 건 '흙' 수준의 거친 감각이다. '무슨 재미로 살아?' 싶은 히라야마는 바람이나 공 수준의 미세한 감각도 누릴 줄 아는 것이다. 감각의 역치를 높이면 높일 수록 술로도 안채워지고, 섹스로도, 약물로도 안채워지는 것이니 우리는 거침에서 미세함으로 향해가는 것이 좋다. 사실 인간은 그러려고 태어나고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거침을 졸업하고 덜 거침을 향해가고, 덜 거침에서 더 덜 거친 것으로... 그렇게 미세함으로 향해간다. 근원에서 확장해 이 세상이 만들어졌으니, 다시 근원으로 돌아가는 방향이 자연스러운 것이니까.
언젠가부터 요가와 명상이라는 틀 안에만 머무는 명상가이고 싶지 않아졌다. 그런 마음 이후로, 대충 아사나하고 대충 명상한다. 특별한 무언가라는 오해에서 벗어나, 숨쉬듯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요가와 명상 밖의 명상가들을 보고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헤세의 '싯달타'가 강물의 소리를 듣게되기 전 출가하고, 고행승이 되고, 다시 세속으로 돌아와 상인으로, 연인으로, 그리고 아버지로서 산 시간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제야 강물에서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을 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니, 내 삶은 충분히 이 세상을 살아내지 못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더 겪고, 더 부대끼고, 자식을 책임지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미워하고 사랑하며 이 생의 삶을 구석구석 끌어안아야, 다음 단계, 진짜 명상으로 갈 수 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