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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과거가 있다

자전적 스토리텔링의 모든 것

by 도서출판 다른
누구에게나 ‘과거’가 있다. 과거를 떠올리며 그 의미를 파악하려 들면 불꽃같은 강렬한 감정이 솟구친다. 인간은 과거의 일들이 자신의 내면을 어떻게 휘두르고 있는지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재에 무언가를 선택할 때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회고록 장르는 지난 20여 년간 독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내가 회고록에 애착을 갖는 건 이 세상 누구라도 회고록을 쓸 수 있다는 민주적 성질 때문이다.

일단 회고록 작가는 책의 주제에 누구보다도 관심이 많다. 그리고 단편적인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지는 회고록의 구조에는 중독성이 있다. 소설에는 얽히고설킨 플롯이 있고, 시에는 음악적 형식이 있고, 역사서와 전기에는 객관적 진실이 있다.

그에 반해 회고록에는 하나의 사건이 다른 사건으로 이어진다. 주인공이 태어나고 사춘기가 되고 성에 눈을 뜬다. 회고록은 사건과 주제, 그리고 한 인간이 지난날을 이해하려 애쓰는 데서 우러나오는 순수하고 설득력 있는 서정성을 엮은 작품이다.


회고록 독자가 늘어난 건 소설 장르에서 일어난 변화 덕분이기도 하다. 제임스 조이스와 버지니아 울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토머스 핀천과 그들의 후예들이 소설을 차츰 환상적 이야기나 디스토피아 이야기, 지나치게 현학적인 장르로 바꿔가자 현실에 목마른 독자들이 회고록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필립 고레비치 Philip Gourevitch는 2005년부터 2010년까지 권위적인 문예지 〈파리 리뷰 The Paris Review〉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문학적 논픽션 작품이 급증하는 현상을 자세히 관찰했다. 다음은 그가 《파리 리뷰》 편집자를 그만둘 때 했던 연설의 일부분이다. 이 연설에서 그는 회고록이 수준 낮은 장르라는 비판은 사진에 회화다운 독창성이 없다고 폄하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지난 50년간 회고록과 르포르타주 그리고 모든 형식, 분량, 문체를 아울러 사실을 다룬 문학 장르에서 흥미진진하고 새로운 작품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문단에는 흔히 논픽션이라 일컫는 장르는 ‘문학’에 낄 자격이 없다는 우월감이 남아 있습니다. 논픽션은 소설보다 왠지 모르게 예술적 기교나 상상력, 창의성이 떨어진다고 은근히 암시하는 겁니다. (……) 하지만 제가 지금껏 잡지에 실은 논픽션 작품은 소설에 견주어 결코 수준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 작가 돈 드릴로 Don DeLillo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가는 의미에서 시작해 그 의미를 나타낼 사건들을 만들어내고, 회고록 작가는 사건들에서 시작해 의미를 끌어낸다.” 이런 면에서 회고록은 체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회고록에 적힌 내용을 대부분 사실이라고 믿는 건 순진한 착각이기도 하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는 인위적인 요소가 끼어들 수밖에 없다. 제대로 쓴 회고록은 예술 작품이다. 있었던 일을 그냥 줄줄 적어 놓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작가가 여러 사건 중 하나를 골라 쓰기로 한 순간, 그 과거에는 어떤 식으로든 특정한 의미가 부여된다. 이는 도덕적 선택으로도 볼 수 있다.

회고록은 또한 녹취록 없이 대화를 재구성하는 소설적 장치를 사용한다. 이때 독특한 문체를 빚어내려면 시인만큼이나 정교한 작업을 해야 한다. 따라서 훌륭한 회고록은 연구할 가치가 있다. 회고록을 쓴다는 건 독자를 위해 경험을 만드는 일이다. 잠시 스치고 마는 감흥 그 이상을 안겨줄 수 있도록 작가의 지난날을 생생하게 불러오는 일이다. 작가는 독자와 함께 긴 여행을 떠나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드러낼 수 있는 가장 분명한 진실을 보여줘야 한다.


즉, 회고록은 인간이 빚어낸 경험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빼어난 회고록은 자신만의 이유로 과거의 진실을 찾아다니는 인간의 영혼에서 우러나온다. 그러고 보면 내가 아는 모든 회고록 작가는 죽음의 행진을 하듯이 고뇌하며 과거를 탐색하는 운명에 처한 듯 보인다. 그런데 사석에서 만나보면 그들은 아주 솔직하다. 과거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합리화하기보다는 과거를 궁금해하는 쪽이다.

의심과 걱정이 많지 않은 사람, 손톱을 물어뜯으면서 툭하면 사과하는 성격이 아닌 사람, 그리고 사고가 유연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회고록을 쓰는 데 적합하지 않을 수 있다. 위와 같은 성격은 내가 만나본 회고록 작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진실은 그들의 ‘적’이 아니다. 진실은 지하실로 가는 어두운 계단 위에서 주위를 더듬을 때 붙잡는 난간이다. 다시 말해 해결책이다. 호기심을 품고 진실을 파헤치다 보면 글이 저절로 써지기 마련이다. 그 첫 번째 단계는 바로 과거의 생생한 이야기 속으로 돌아가 그때의 몸과 마음과 두근거리는 심장을 다시 체험하려는 욕구를 느끼는 것이다(뇌리를 떠나지 않는 강렬한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걸 글로 옮기느라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두 번째 단계는 단순히 그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닐까? 근데 이건 생각보다 어렵다.


회고록을 쓴다는 건 어떤 면에서 자기 주먹으로 자기를 나자빠지게 하는 일이다. 특히 제대로 잘 썼을 땐 더욱 그렇다. 물론 감정을 쏟아내는 작업을 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자기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회고록을 쓰고 나면 깊은 심리적 변화를 겪게 마련이다. 그러지 않고는 못 배긴다. 회고록만큼 사람을 뒤흔드는 창작 분야는 또 없을 것이다. 회고록을 쓰면 이제는 곁에 없는 사람들과 다시 만날 수 도 있다. 수십 년 동안 그리워했던 시간과 장소가 눈앞에 뚜렷하게 다시 나타나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빼어난 회고록을 쓴 작가들은 하나같이 글 쓰는 과정이 고약하고 끔찍했다고 전한다. 과거에 대한 환상과 실제로 일어난 일 사이의 거리를 좁히려고 할 때마다 고통에 몸부림쳤다고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의 글을 고쳐주거나 방향을 제시해줄 때마다 영화 〈플래툰 Platoon〉에서 배우 톰 베린저가 연기한 못된 하사관이 된 기분이 든다. 그는 배에서 내장이 빠져나와 비명을 지르는 병사 위로 몸을 구부려 이를 악물고 쉰 목소리로 계속 말한다. “통증을 받아들여.” 병사가 입을 다물고 내장을 주섬주섬 뱃속으로 밀어 넣기 시작할 때까지.


자기 자신을 아무리 잘 아는 사람이라도 회고록을 쓰다 보면 속이 다 뒤틀리기 마련이다. 이미 틀을 잡아놓은 자아, 깔끔한 분석과 흠잡을 데 없는 변명거리를 내세운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소소한 믿음과 무의식적인 가식은 어김없이 우리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다.
글쓰기를 미루고 싶은 마음에 ‘자료조사’를 하느라 바쁠 수도 있다. 하지만 회고록 쓰기의 진짜 적은 밤에 거울 앞에서 치실로 이를 닦을 때 우리를 쏘아보는 존재다. 바로 우리의 자아와 무수히 많은 가면.

진실하다는 건 지어낸 사건들로 독자를 속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름답다는 건 독자가 읽기에 아름다워야 한다는 뜻이다. 아름다운 작품은 또다시 읽고 싶어진다. 너무도 살갑고 믿음직하고 진짜 같아서 몇 번이고 손이 간다. 작품 속에 나오는 장소와 분위기가 그리워진다. 등장인물들은 애타게 보고 싶어 하던 오랜 친구들 같다.
우리는 회고록을 읽으며 지적 즐거움을 얻기도 하지만, 보통은 화자와 감정적으로 교감하면서 빠져든다. 훌륭한 작가는 독자의 마음속에서 풍경과 사람들을 되살린다. 위대한 작가는 독자에게 자신의 가장 내밀한 약점마저 보여준다. 꾸밈없이 발가벗은 인간을 보면 누구나 조금은 흥분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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