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적 스토리텔링의 모든 것
회고록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온전히 ‘목소리’에 달렸다. 목소리는 저자의 내면적·외면적 경험을 전달하는 매개체다. 그런 만큼 작품 안에서 작가 특유의 재능이나 세계관을 가장 잘 살릴 수 있도록 정교하게 짜야 한다.
회고록 작가는 몇 가지 사실을 끄적이고 일화를 늘어놓으며 어설프게 글을 쓰기 시작한다. 작가 자신과 경험에 어울리는 유일한 목소리는 수백 쪽을 쓰고 나서야 겨우 드러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목소리를 찾고 나면 육체적·정신적 체험들이 뚜렷이 되살아나고 불꽃이 튀듯 글쓰기 작업에 생기가 돈다. 독자를 생각한다면 반드시 첫 문장에서부터 작가의 목소리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
회고록은 형식이 매우 간단하므로 특히 형편없는 작품의 경우에는 사건들이 아무렇게나 얄팍하게 다뤄진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는 독자의 상상 속에 한 사람의 삶을 실감나게 그려내기 때문에 아무리 사건이 지루하고 내용이 삼천포로 빠지더라도 독자의 주의를 놓치는 일이 없다. 독자는 목소리가 바로 화자라고 여긴다. 줄거리 자체가 흥미진진하면 물론 좋겠지만 목소리가 훌륭하면 몹시 따분한 사건도 특별해지는 법이다.
회고록에 어울리는 목소리를 찾으려면 작가 자신의 심리적 갈등에 관한 내적 진실을 이정표로 삼아야 한다. 작가는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만들어가면서도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성격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요소를 선택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작품의 목소리는 작가를 닮아 있다. 목소리는 작가의 가장 흥미로운 천성을 반영하며, 가장 핵심적인 자아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작가의 목소리는 친근하게 느껴지며 마치 작가의 몸속에 들어가 세상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을 안겨준다. 허클베리 핀이나 스카우트(《앵무새 죽이기》의 어린 화자) 같은 허구의 인물을 반쯤 친구로 여기지 않는 독자가 어디 있을까?
목소리는 적당한 수준의 감정적 어조를 띠어야 한다. 너무 잘난 체하면 감정이 메마른 느낌이고, 너무 감성에 빠지면 애처로워진다. 냉정하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도 있고 요란하며 친근한 목소리도 있다. 이렇게 목소리는 작가와 작품 사이의 거리, 그리고 작가와 독자 사이의 거리를 조정하고 변화시킨다. 작가가 목소리의 성질을 선택한다기보다 그가 어떤 사람이고 과거에 어떤 경험을 했는지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 성질이 나타나는 것이다.
목소리는 단지 이야기하는 방식만은 아니다. 작가가 과거의 자신을 생생히 떠올릴 때 자연히 싹트는, 집필을 위한 마음가짐이며 보고 듣고 느끼는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일이 그토록 중요하다.
삶을 돌아본 적이 없으며 갈등이 생겼을 때 타인의 입장을 헤아릴 능력이 없는 작가는 자신을 방어하려는 본능이 튀어나와 그가 진실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가로막기 십상이다. 그래서는 좀처럼 목소리를 빚어내지 못한다.
그리고 인간은 본래 현재의 자아를 과거에 덧씌우는 경향이 있어서 현재 자신의 정체성과 어긋나는 것들은 잘 떠올리지 못한다. 쉽게 해석할 수 있도록 사실을 비틀어버리기까지 한다. 따라서 회고록 작가는 왜곡한 과거를 일일이 털어놓아야 하고, 반성과 불확실성을 목소리에 반영해야 한다.
작가는 처음부터 미화나 위선 없이 내면으로 되도록 깊이 파고들어 깨달은 바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어야만 한다. 달리 작업하는 작가도 있겠지만, 나와 대화를 나눈 뛰어난 회고록 작가들은 하나같이 아무리 지긋지긋하더라도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회고록의 대표적 특징이다. 진실이 심어놓은 지뢰를 밟아 폭발시켜야 작품이 탄생한다.
독자가 글 속에서 작가 스스로 인정하지 않은 기만이나 뒤틀린 심보를 알아채는 순간, 작가의 권위는 떨어진다. 그러면 독자는 책에 흥미를 잃고, 작가는 달달한 아이스크림이나 텔레비전 리모컨과 경쟁해야 한다. 이기기 어려운 상대다.
현실에서 사람들을 매혹하듯이 글로도 사람들을 매혹해야 한다. 많은 작가가 매력을 폄하해왔지만, 내가 말하는 매력은 뱀 곡예사가 이빨 뽑힌 불쌍하고 어리석은 짐승을 가지고 묘기를 부리는 걸 가리키는 게 아니다. 그런 식으로 독자를 대한 작가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한껏 멋을 부리며 작가의 자아만을 만족시키는 따분하고 난해한 책들이 있는 거다.
영어로 ‘매력 charm’이라는 말은 ‘노래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카르멘 carmen’에서 유래했다. 즉 내가 말하는 매력이란 독자를 끊임없이 붙들어놓을 정도로 잘 노래하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작가가 지닌 장점은 글 속에서도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작가는 자신의 단점들을 상기하며 겸손해지곤 한다. 독자를 사로잡으려면 이러한 작가의 아름다움과 추함이 둘 다 드러나야 한다.
슬프게도, 글 속에 작가의 옹졸함이나 허영, 음모 등 어두운 면모가 눈에 띄지 않으면 거짓이 섞여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을 받는다. 이를테면 따뜻한 심성으로 인기가 있는 사람이 알고 보면 쉽게 화를 내거나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는 인간일 수 있다. 매력적이며 자신감 넘치는 모습 속에 음모를 꾸미며 남을 속이는 재주를 숨기고 있기도 하다. 내향적이고 속이 깊은 것 같지만 은근히 남을 깎아내리는 성격도 있다.
회고록 작가는 모든 점을 시인해야 한다. 자신을 실제보다 상냥하고 똑똑하고 민첩하고 재미있는 사람으로 포장하는 버릇에서 벗어나야 한다. 회고록 작가는 좋은 말만 해서는 안 된다.
평소 같으면 전혀 어울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라도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진솔한 경험을 이야기할 때면 귀가 솔깃해지곤 한다. 비행기를 탔는데 옆자리에 재미없는 수다쟁이가 앉는 바람에 피곤한 대화에서 벗어나려고 잠든 척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수다쟁이가 여행자 신분에서 오는 익명성을 무기로 마음을 건드리는 경험을 이야기하면, 그 고백에 그만 홀려버리고 만다. 잠깐 동안 엘리베이터에 같이 타기조차 싫은 사람인데도. 극단적 고통과 기쁨을 노래하며 살아 숨 쉬는 내면을 드러낸 진솔한 이야기는 언제나 매혹적
이다.
왜냐하면 열정적인 경험을 이야기한다는 건 사실 위험하기 때문이다. 감정이 들어가면 드라마가 탄생한다. 한 인간의 작은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위험한 감정적 갈등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목소리가 꼭 오페라처럼 요란해야 하는 건 아니다. 콘로이나 나보코프 같은 작가는 더할 나위 없이 말을 아꼈지만, 그들의 어조가 차분하다고 해서 감정의 깊이가 얕다고 생각하는 독자는 없다.
가짜 자아를 쓰고 있는 옆 사람 때문에 지루해한 적도 많지만, 그만큼 모르는 사람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생한 열정을 흐뭇하게 바라본 적도 많을 것이다. 아무리 폐쇄적이고 까칠한 척 감정을 늘 억제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에는 감정을 진솔하게 전하는 법이다. 또한 아무리 말솜씨가 없더라도 스쳐가는 교감의 순간들을 통해 훌륭한 교향곡처럼 듣는 이의 마음을 들었다 놓았다 할 수 있다.
회고록도 마찬가지다. 모든 드라마는 우리가 서로 교감해야 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드라마를 겪어야 하는 운명이다. 운이 매우 좋은 사람일지라도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저주받은 운명을 견뎌내며 살아가야 한다.
즉 사랑하는 사람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수년간 병상에 누워 괴로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것이다. 못생기고 가난하게 태어나거나, 혹은 부유하고 잘생겼지만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 이상적인 가정에서도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의 희망을 부수어버린다. 중요한 순간에 나타나지 않거나, 다정한 손길을 간절히 바라고 있을 때 나타나 슬픔과 부끄러움을 안겨준다.
회고록을 출간하면서 나는 부수적인 효과를 얻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다가와 처음 만났을 때 예의상 나누는 잡담일랑 건너뛰고 그들의 인생에서 가장 파란만장했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나를 감동시켰다. 내가 남에게 쉽게 공감하거나 다가가는 성격이 전혀 아닌데도 말이다.
머리가 나쁜 사람이든, 어눌하게 우물거리며 말하는 사람이든, 살아 숨 쉬는 인간은 직접적으로 아주 많은 걸 전할 수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불쌍하고 헐벗고 한쪽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짐승”이라 부른, 심장이 뛰는 생명체의 육체가 눈앞에 있기만 해도 저절로 관심이 쏠린다.
인간은 공감하는 그 순간, 타인 안에서 자기 자신을 보는 법이다. 서로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호르몬인 옥시토신 분비량이 늘어난다. 옥시토신은 엄마가 아기에게 모유를 먹일 때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엄마와 아기의 유대감 형성에 도움이 된다. 인간은 서로 이야기하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치 원시 부족처럼 교감하는 것이다.
우리는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누구나 세상일을 자신만의 잣대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기억은 현재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가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목소리는 작가의 고유한 재능에서 우러나오고, 작가의 재능은 타고난 성격에서 솟아난다. 회고록 작가의 개성은 글에서 마법 같은 힘을 발휘하는 동시에 작가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옹졸하고 불화를 일으키는지도 드러내기 마련이다. 따라서 훌륭한 목소리에는 작가의 내면이 담겨 있다. 작가의 목소리가 사건을 구성하거나 파악하는 과정을 보면서 독자는 작가의 자아가 지닌 모습과 약점, 기호, 욕구를 한시도 놓치지 않고 지켜볼 수 있다.
기억이 사실을 변형시키듯이 자아는 단순한 감각 자극도 왜곡하여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목소리는 그러한 왜곡을 반영해야 한다. 빼어난 회고록 작가들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화자가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지 일일이 설명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다시 말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에 의문을 품는다. 더욱 진중하고 믿음직한 작가는 의문을 품는 데 그치지 않고 옳고 그름을 따져 밝힌다.
그렇다면 주관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인식이 거짓에 물들기 쉽다는 걸 누구나 다 아는 상황에서 회고록의 진실성은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불교 신자는 자아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마야(환영) 또는 ‘미혹’이라 부른다. 심리학자는 인간이 지난날의 상처를 현재의 사소한 사건 속에 어떻게 투사하는지 짚어낸다. 그러니 진실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을까?
기억 자체도 어렴풋한 데다 자아를 의식하기 때문에 회고록 작가는 혀로 아픈 이를 건드리듯 툭하면 자신의 의심마저 들쑤신다. 깊고 진실한 목소리를 찾아내려면 글을 쓰면서 자신이 과거를 어떤 식으로 잘못 인식하는지 파악해야 한다. 그러려면 하나의 상황을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 목소리는 객관적 권위가 아니라 주관적 호기심을 추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는 내 책에서 우울한 분위기에 끌리는 성격이라고 고백해야 직성이 풀린다. 선을 넘을락 말락 하는 음울한 유머 덕분에 내가 죽지 않고 살았으므로 그러한 유머가 내 책에 나와야만 한다.
어렸을 때 언니가 자기는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는데 왜 나만 그랬냐고 물어봤던 순간 나는 “언니는 별로 안 예뻤나 보지” 하고 빈정거렸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사건의 의미를 비틀어 타인을 깎아내린 것이다. 이런 내 이야기를 명랑한 치어리더처럼 노래하는 건 거짓말이나 마찬가지다. 암울함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믿음직한 목소리는 작가가 여러 가지 ‘진실’을 쥐어짜면서 현실을 서술하거나 창조한 방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우리는 풍경을 읽는다기보다 우리 눈에 비친 풍경을 반사해내는 것이다.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는 글을 써나가면서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적으며 단어들을 이리저리 옮겨보다가 자신만의 재능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그 재능이 처음부터 끝까지 눈에 띄도록 책을 구성해야 한다. 독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용어 선택과 문장에 치중할 필요는 없다. 그저 진실하게 쓰면 된다.
내가 우러러보는 회고록 작가들의 목소리에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과거의 잘못을 정당화하며 자신을 미화하는 기술이 없다. 각자의 풍성한 내면에서 훈련을 거친 작가만이 진정한 예술가로 거듭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알고자 하는 작가는 허영심을 떨쳐낼 줄 안다. 이를테면 파티에 입고 갈 옷을 고를 때 솟아나는 그런 허영심 말이다. 그 대신 그는 차라리 대담하게 발가벗고 파티에 나타난다.
◐ '기억'이 문학이 되는 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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